탈모 샴푸 그래비티를 개발한 이해신(가운데) 카이스트 화학과 석좌교수와 연구진

2023년 11월 이해신 카이스트(KAIST·한국과학기술원) 화학과 석좌교수는 여자 제자에게 샴푸통 하나를 건넸다. 샤워 후 빠진 머리카락으로 채워진 수구멍을 사흘마다 비운다는 고민을 들은 뒤였다. 샴푸를 일주일 동안 쓴 제자는 이 교수에게 전보다 머리카락이 덜 빠진다고 전했다. 탈모 완화에 좋다고 입소문 나면서 국내외에서 완판 행진 중인 샴푸 그래비티가 출시 전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13일 대전 카이스트 연구실에서 만난 이 교수에겐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 신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 말고도 다른 직함이 있다. 탈모 케어 샴푸 그래비티(Grabity)를 제조·판매하는 스타트업 폴리페놀팩토리의 대표다. 그래비티와 폴리페놀팩토리는 실험실 연구 결과가 학문적 성취에 그치지 않고 실생활 제품과 접목하는 상업화를 고민하던 이 교수의 작품이다.

이 교수는 그래비티의 핵심 원료인 폴리페놀만 20년 넘게 연구한 전문가다. 폴리페놀은 식물, 동물에서 발견되는 천연 물질이다.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당시 홍합이 내뿜는 액체 물질 폴리페놀 성분에 집중했다. 껍데기가 딱딱한 홍합을 바다 안 바위에 딱 붙어 있게 한 폴리페놀의 가치를 알아봤다.

그는 홍합이 물속에서도 강력한 접착력을 유지하는 비결이 폴리페놀에 있음을 밝혀냈다. 폴리페놀은 물에 들어가면 녹고 퍼지는 일반 접착 물질과는 달랐다. 이 교수는 홍합에다 떼었다 붙이길 평생 반복할 수 있는 도마뱀 발바닥의 특징을 결합한 연구 논문으로 2007년 세계적 학술지 네이처지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얇은 모발, 꽉 잡아주는 그래비티

탈모 샴푸 그래비티 제품 모

이후엔 폴리페놀을 상용화하는 작업에도 관심을 가졌다. 폴리페놀이 단백질과 잘 반응한다는 특성을 고려해 2017년 개발한 피 안 나는 주삿바늘이 대표적이다. 바늘 끝부분에 코팅한 폴리페놀이 혈액 내 단백질과 붙어 얇은 막을 형성, 지혈을 해준다. 바늘을 뺐을 때 지혈에 어려움을 겪는 당뇨 환자 등을 겨냥한 발명품이다.

그래비티도 원리는 이 바늘과 비슷하다. 샴푸 속 폴리페놀은 모발이 솟아나는 모공에 얇은 막을 만든다. 이렇게 생긴 막은 모발이 얇아지면서 잘 빠지는 탈모 현상을 완화해 준다. 폴리페놀은 단백질로 이뤄진 모발에 잘 붙어 머리를 감을 때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이 샴푸와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을 하고 2023년 8월 제자들과 함께 카이스트의 교원 창업 지원을 받아 폴리페놀팩토리를 열었다. 폴리페놀팩토리를 세운 후 이듬해 4월 그래비티를 내놓기 전까지 황금 배합 비율을 찾는데 공을 들였다.

기존 샴푸 성분에 폴리페놀을 넣었을 때 섞이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이었다. 폴리페놀이 샴푸 성분에 녹아들지 않아야 모발에 잘 붙기 때문이다. 또 폴리페놀이 너무 많으면 머리카락이 뻣뻣할 수 있다.

"과학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비티 임상시험을 위해 카이스트 연구실 내에 설치한 샴푸대

이 과정에서 카이스트 연구실에는 과학 시설과는 관계없는 미용실 샴푸대가 생겼다. 연구진은 샴푸대에서 시제품으로 하루에 머리를 네다섯 번 감고, 카이스트에 다니는 내·외국인 학생 300여 명이 임상시험에 참여했다. 제품 테스트를 마친 폴리페놀팩토리는 2024년 4월 그래비티를 정식 출시했다. 중력, 움켜쥐다를 각각 뜻하는 영단어 'Gravity', 'Grab'을 더한 말이다. 중력을 거스를 정도로 모발을 힘 있게 세우고 머리카락을 꽉 붙잡아 지킨다는 뜻을 담았다.

그래비티는 출시 직후 네이버 탈모샴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등 입소문을 탔다. 2024년 9월 롯데홈쇼핑에서 주문 30분 만에 10억 원어치를 팔았다. 또 3월 CJ올리브영 매장에서 선보이자마자 헤어케어를 넘어 전체 상품 부문 판매 1위를 달성했다. 현재까지 누적 판매량은 152만 병이다.

그래비티는 해외 시장 공략도 시작했다. 9월 30일 일본 이커머스(전자상거래 업체) 라쿠텐에서 공식 판매를 한 그래비티는 출시 첫날 K뷰티 상품을 통틀어 매출 1위에 올랐다. 이달 15일부턴 일본 내 뷰티 편집숍 리메이크 매장 10곳에서 오프라인 판매도 개시했다.

폴리페놀팩토리는 그래비티의 성공을 바탕으로 신제품을 고민하고 있다. 모발을 꽉 잡아주는 폴리페놀의 성질을 이용해 곱슬머리를 펴주는 제품이다. 곱슬머리가 많은 흑인을 대상으로 한 샴푸다. 이 대표는 "저희는 콘셉트, 마케팅을 중요하게 여기는 기존 뷰티 제품과 다르게 과학을 바탕으로 제품을 만들었다"며 "앞으로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과학을 통해 제품을 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