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와 자원 고갈이 심화되면서 순환경제 전환의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다. 특히 포장재를 중심으로 한 폐기물 문제는 국가적 과제다. 한국은 2003년 「자원의 절약과 재활용 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으로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 Extended Producer Responsibility) 를 도입했지만, 그 성과와 실효성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소비자에게 떠넘겨진 부담

EPR의 취지는 명확하다. 제품을 시장에 내놓은 생산자가 사용 후 폐기까지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제도 운영은 달랐다. 생산자가 직접 재활용 의무를 수행하기보다, 공제조합을 통해 금전적 분담금 납부로 대신하는 방식이 일반화됐다. 이 과정에서 기업의 실질적 설계 개선 동기는 약화되었고, 분담금은 제품 가격에 전가되어 소비자가 최종 부담하게 되는 구조가 고착화되었다.
또한 분리배출 표시제는 소비자에게 지나치게 복잡한 해석을 요구한다. PET, PP, OTHER 등 전문가가 아니면 알기 어려운 기호가 제품 라벨에 작게 표기될 뿐이다. 소비자는 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결국 재활용 행위는 혼란 속에서 형식적으로 이뤄진다.

국제 사례와의 격차

독일, 일본, 북유럽 등은 EPR 제도를 생산자 중심으로 엄격하게 운영한다. 독일은 재활용이 어려운 포장재에 더 높은 비용을 부과하여 기업의 설계 개선을 유도하고, 일본은 소비자 혼란을 줄이기 위해 명확한 행동 지침을 제공한다. 스웨덴은 보증금 환불제를 결합해 90% 이상의 회수율을 달성했다. 반면 한국은 표기 형식주의와 금전 납부 구조에 머무르며 제도의 취지가 퇴색했다

개혁의 방향

전문가들은 한국형 EPR 개혁을 위해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한다.
생산자 책임의 실질화 – 단순 분담금 납부가 아니라, 친환경 설계 기준 미준수 시 시장 진입 제한 등 직접 제재를 도입해야 한다. 소비자 친화적 정보 제공 – 라벨 전면에 직관적인 등급 표시(예: 재활용 우수·어려움)를 의무화하여 구매 단계에서 환경정보를 쉽게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국제 정합성 확보 – ISO와 선진국 표준에 맞추되, 한국적 산업 구조에 적합한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

결론

EPR은 본래 ‘오염자 부담 원칙’을 구체화한 제도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생산자의 금전적 의무가 소비자 가격으로 전가되며, 제도의 신뢰성을 흔들고 있다. “분담금을 내면 된다”는 기업 논리를 넘어, 실질적인 설계 혁신과 소비자 신뢰 회복이 필요하다. 기후위기 시대, 포장재 재활용 정책은 단순한 폐기물 관리가 아니라 산업 경쟁력과 세대 간 책임을 좌우하는 핵심 의제다.

[관련논문] https://drive.google.com/file/d/156Pe17mvRbzshA1ZwyV2BJyEAmyOTSTT/view?usp=drive_lin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