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말에 모 일간지 경제면에 ‘정부가 대기업에게 청년 채용계획을 묻는다’는 기사와 ‘주 4.5일추진관련 논의’기사가 함께 실렸다. 우리는 경제 주체로 정부, 기업, 개인을 꼽는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지니면서도 한 사회의 경제를 지탱하는 세 축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흔히 말하는 VUCA, 즉 불확실성(Volatility), 불확실성(Uncertainty), 복잡성(Complexity), 모호성(Ambiguity)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술의 발전은 가속화되고, 산업의 경계는 흐려지며, 사람들의 가치관도 빠르게 달라진다. 이에 따라 정부의 역할, 기업의 책임, 개인의 일과 삶의 방식도 급격히 변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변화의 흐름에 제도와 법이 충분히 따라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현실은 이미 바뀌었는데, 제도는 여전히 과거의 속도에 머물러 있다.

주 4.5일제, 단순한 근로시간 논쟁일까?

최근 ‘주 4.5일제’ 논의가 좋은 예다. 근로시간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자는 움직임은 자연스러운 시대적 요구다. 하지만 경제주체별로 보면 그 효과와 의미는 단순하지 않다. 기업 입장에서 보면 생산성과 효율성의 재조정이 불가피하다. 대기업은 자동화와 디지털 전환을 통해 근로시간 단축을 흡수할 여력이 있지만, 중소기업은 여전히 사람의 노동에 크게 의존한다. 결국 동일한 제도가 업종과 규모에 따라 전혀 다른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가 기대된다. 여가의 확대는 자기계발, 가족과의 시간, 지역사회 참여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전제가 ‘동일한 임금’이거나 그 이상일 때 가능하다. 임금이 줄거나 일자리가 불안해진다면 근로시간 단축은 오히려 불안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제도의 의도가 아무리 좋아도 현실의 기반이 약하면 그것은 불평등을 확대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정부의 무거운 과제

정부의 역할도 무겁다. 노동시간의 변화는 세금과 복지, 연금과 교육, 산업 경쟁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정책은 사회적 합의를 통해 설계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 법과 제도는 사회의 공기를 읽고, 현실의 언어로 번역해주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선진국 따라하기’의 함정

우리는 종종 “OECD 선진국이 하니까 우리도 해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기대곤 한다. 하지만 박정수 서강대 교수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주요 선진국의 약 3분의 2 수준에 머물러 있다. 생산성과 구조의 차이를 무시한 채 근로시간만 줄인다면, 결과는 단순히 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경쟁력의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 선진국의 제도는 오랜 시간 사회적 논의와 생산성 향상 노력을 거쳐 얻은 결과물이지, 단순히 복제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다.

속도보다 중요한 것은 방향

결국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제도의 ‘속도’가 아니라 그 ‘방향’이다. 기술의 변화가 빠르다고 해서 법이 그 속도를 따라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의 역할은 변화를 무조건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가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성찰할 시간을 마련해주는 데 있다. 제도는 미래를 향해 사회가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도구이지, 유행처럼 차용할 상품이 아니다.

제도는 사회적 사유의 결정체다

이 점에서 제도는 일종의 ‘사회적 사유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그리는가, 그리고 그 미래를 어떤 방식으로 실현할 것인가에 대한 집단적 합의가 제도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제도 개혁의 핵심은 ‘법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모으는 일’이다. VUCA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속도의 경쟁이 아니라 방향의 성찰이다. 정부는 규범의 틀을 새롭게 짜고, 기업은 기술과 조직을 재정비하며, 개인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중심에는 ‘함께 미래를 고민하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 제도와 법은 그 고민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사회의 약속이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제도란 기술이 변했다고 따라가는 도식이 아니라 사회를 앞으로 당기기 위한 집단적 지혜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불확실한 시대를 건너는 사회가 가져야 할 가장 확실한 나침반을 너무 흔들고 그 자체를 바꾸려는 것은 아닐까? 경제를 많이 아는 리더들이 이 사회에 더 많아져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