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12월 14일, 인류는 처음으로 남극점에 발을 디뎠다. 그 영광의 주인공은 노르웨이의 탐험가 로알 아문센이었다. 불과 한 달 뒤, 뒤늦게 남극점에 도착한 영국 해군 소령 로버트 스콧은 이미 깃발이 꽂힌 설원에서 좌절을 맛봤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전원이 사망했다.
둘의 차이는 단지 한 달이었지만, 역사는 극명하게 갈렸다. 왜 그랬을까?

일본의 지식인 야마구치 슈(山口周)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에서 이 사건을 조직과 개인의 사고방식 차이로 설명한다. 스콧은 “이성의 인간”이었다. 군인 출신답게 치밀한 보고 체계, 명확한 규율, 위계질서를 중시했다. 반면 아문센은 “감각의 인간”이었다. 현장에서의 판단, 몸의 반응, 자연과의 교감을 중시했다.
야마구치 슈는 말한다. “스콧은 합리적으로 실패했고, 아문센은 비합리적으로 성공했다.”

합리적 실패와 비합리적 성공

스콧의 탐험대는 그야말로 ‘과학적’이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가 후원한 그는 최신 기술과 장비를 총동원했다. 석탄을 태우는 모터썰매, 군마 대신 시베리아산 조랑말, 방한복은 울과 면으로 만든 ‘최신형 영국산’. 그러나 그들은 남극의 현실을 몰랐다.
온도가 떨어지면 모터썰매의 윤활유가 얼어붙고, 조랑말은 차가운 바람에 주저앉았다. 사람들은 썰매를 직접 끌어야 했고, 영양실조와 동상으로 하나둘 쓰러졌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완벽한 계획을 세웠지만, 실제 상황에는 무능했다.

반면 아문센은 철저히 비합리적이었다.
그는 과학 대신 경험과 직관을 믿었다. 북극에서 이누이트들과 함께 살며 개썰매 운전법과 방한복 제작법을 배웠다. 그는 “인간의 기술이 아니라 자연의 방식이 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순록가죽 옷을 입고, 개썰매를 택했으며, 식량은 현지 사냥으로 보충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스콧의 과학은 얼어붙었고, 아문센의 감각은 살아남았다.

두 리더의 다른 철학

스콧은 명령을 내리는 지휘관이었다. 그의 탐험대원들은 지시를 따르는 부하였다.
그에게 실패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체계의 붕괴였다. 그래서 그는 실패를 두려워했고, 계획을 바꾸지 않았다.
반면 아문센은 탐험대 전체를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였다.
그는 구성원들과 매일 토론하고, 각자의 몸 상태와 직관을 존중했다. 목표는 ‘정상 도달’이 아니라 ‘모두의 생존’이었다.

야마구치 슈는 이런 차이를 “인지 편향이 아닌 세계관의 차이”라고 표현한다.
스콧은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라는 서구의 전통적 관념 속에 있었고,
아문센은 “자연은 교감의 대상”이라는 감각적 철학 속에 있었다.

오늘날 기업 조직을 봐도 이 대조는 그대로 반복된다.
스콧형 리더는 KPI, 보고서, 절차로 무장한다.
아문센형 리더는 현장에서 감각을 세우고, 환경과 호흡하며, 필요하면 계획을 바꾼다.
위험을 예측하려는 사람은 실패의 이유를 분석하지만, 위험과 함께 사는 사람은 실패를 피부로 느끼며 회피한다.

우리가 배워야 할 아문센의 ‘철학적 실용주의’

아문센의 성공은 단순히 ‘노르웨이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사고방식의 혁명이었다.
그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환경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나를 바꿔야 한다”고 믿었다.
즉, ‘적응’이야말로 최고의 전략이었다.

야마구치 슈는 이 점을 ‘지적 겸손(intellectual humility)’이라 부른다.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태도는 오만이다.
반대로, 세상은 본질적으로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비로소 창의적이고 유연한 행동이 나온다.
아문센은 그 겸손함으로 극지의 냉혹한 바람을 견뎌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AI, 기후변화, 글로벌 공급망—이 모든 불확실성의 시대에 ‘스콧형 조직’은 여전히 문서를 정비하고 회의록을 작성한다. 반면 ‘아문센형 리더’는 현장으로 나가 데이터를 몸으로 느낀다.
결국 변화를 이끄는 사람은 정확한 계획을 가진 자가 아니라, 감각을 열어둔 자다.

결론: 철학이 없는 이성은 얼어붙는다

남극의 차디찬 바람은 지금도 우리 사회를 스쳐 간다.
합리성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
철학이 없는 이성은 얼어붙고, 감각이 없는 과학은 길을 잃는다.
아문센이 스콧보다 먼저 도착한 이유는 단순한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태도였다.

야마구치 슈의 말처럼, “진짜 지성은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남극점은 여전히 인간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계획으로 나아갈 것인가, 감각으로 살아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