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홀트는 미국 사우스다코타주에서 밀 농사를 짓던 농부였다. 1927년 한 살 위의 버사와 결혼한 뒤 오리건주로 이주해 목재 사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45세이던 1950년 심장마비로 죽을 고비를 맞자 “목숨을 건진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남을 도우며 살아가겠다”고 결심했다.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건강을 되찾고 독실한 신앙인이 됐다.
1954년 12월 14일 집 인근의 유진고등학교 강당에서 밥 피어스 목사 강연회가 열렸다. 한국전에 종군기자로 참여한 그는 선명회(현 월드비전)를 창립해 전쟁고아와 미망인을 위한 모금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홀트 부부는 피어스 목사가 제작한 한국전쟁 다큐멘터리 ‘잃어버린 양’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성금을 내긴 했지만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집에 돌아간 뒤에도 잿더미 속에서 울부짖는 어린이들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홀트 부부에게는 1남 5녀의 자녀가 있었다. 부부와 자녀를 포함한 식구 수만큼 8명의 고아를 거두어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어린이는 사랑받을 때 가장 아름답게 자란다”는 소신에 따라 긴급구호나 지원보다 가정을 만들어주는 게 절실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2차대전 직후 유럽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제정된 미국의 난민구호법은 한 가정의 외국인 입양아를 2명까지만 허용해 8명의 입양이 불가능했다. 홀트 부부는 각계에 호소했다. 연방의회는 홀트 부부의 청원을 받아들여 이 제한을 푸는 ‘전쟁고아 구제를 위한 특례법’을 통과시켰다. 일명 홀트 법안이다.
홀트 부부는 농장 일부를 팔아 자금을 마련한 뒤 1955년 6월 한국으로 건너갔다가 10월 14일 전쟁고아 12명을 비행기에 태워 포틀랜드공항에 도착했다. 이 가운데 8명을 자녀로 맞아들이고 4명은 다른 집에 입양을 주선했다. 이제 자녀가 14명이 됐다. 이 소식이 언론에 보도되자 수백 곳에서 입양 문의와 후원 제의가 쏟아졌다.
홀트 부부는 이듬해 2월 서울 중구 정동 구세군 대한본영에 ‘홀트씨해외양자회’를 설립했다. 기존 보육기관들과 달리 ‘모든 아동은 가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는 이념 아래 입양을 통해 아이들의 양육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1960년 9월 발족한 재단법인 홀트씨양자회는 1972년 사회복지법인 홀트아동복지회로 이름을 바꿨다.
처음에는 전쟁고아들을 주로 미국 가정에 입양시키다가 1960년대부터는 혼혈아동을 미국과 유럽 각국으로 보냈다. 버려진 아이 가운데는 장애아도 많았다. 이들이야말로 가정이 절실했으나 국내에서는 입양을 꺼려 어쩔 수 없이 해외 입양을 택하는 사례도 많았다.
넘쳐나는 고아를 수용하기 위해 1958년 서울 은평구 녹번동에 보육시설을 지은 데 이어 1962년 경기도 고양시에 보육·지체장애인 시설인 일산원을 세웠다. 일산원은 홀트일산복지타운과 일산요양원으로 발전했다. 1975년에는 장애인 특수학교 홀트학교도 문을 열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뿐만 아니라 영유아 보육, 한부모 가족 복지, 아동·청소년 지원, 장애인 교육과 재활, 국제개발협력 등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해리 홀트는 1964년 4월 28일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기 두 명을 안고 담요를 덮어주었다고 한다. 버사 홀트는 남편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의 홀트아동복지회를 성장시키는 동시에 미국에 본부를 둔 홀트인터내셔널을 10개국에 지부를 거느린 국제협력단체로 발전시켰다. 버사 홀트는 2000년 7월 31일 오리건주 유진시에서 96세의 나이로 숨진 뒤 유언에 따라 일산원의 남편 곁에 묻혔다.
정부는 홀트 부부에게 국민훈장 최고 영예인 무궁화장을 1995년 수여했다. 홀트 여사는 1974년에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것을 비롯해 1966년 세계의 여성상, 2000년 키와니스 세계 봉사상 등을 받았다. 키와니스 세계봉사상은 테레사 수녀, 여배우 오드리 헵번, 미국 대통령 부인 로잘린 카터와 낸시 레이건 여사 등이 수상한 권위 있는 상이다.
홀트 부부의 셋째딸 말리 홀트는 1956년 오리건대 간호학과를 졸업한 뒤 한국에 간호사가 필요하다는 부모의 말에 따라 홀트아동복지회 영아원과 보육원에서 일했다. 1960년대 경남과 전남북을 돌며 무의촌 주민 보건에 힘을 쏟는가 하면 미국에서 뇌성마비 등 특수재활의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홀트복지타운 원장, 홀트아동복지회 이사와 이사장 등도 역임했다.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60여 년 동안 ‘말리 언니’로 불리며 한국에서 장애인과 고아의 친구로 지냈다. 2012년 골수암 판정을 받고 투병하다가 2019년 5월 17일 84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한국 정부는 국민훈장 석류장, 대한적십자사 인도장, 펄벅재단 올해의 여성상, 노르웨이 왕실 훈장 등으로 그의 헌신과 노고를 기렸다.
한국이 ‘최대 아동 수출국’이란 오명을 쓰는 동안 홀트아동복지회는 ‘고아를 팔아 돈을 번다’는 비난에 시달렸다. 일부 비인도적 사례와 문제점이 드러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턱없이 부족한 보육시설과 뿌리 깊은 혈통 중심 문화 속에서 많은 아이에게 가정을 찾아주고 장애아들을 돌본 공로는 인정받아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