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위트컴 장군’
2023년 11월 11일, 부산시 남구 대연동의 평화공원에는 군복 차림의 서양인 남성이 아이들과 손잡고 걸어가는 모습의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면 바닥에는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리처드 위트컴 장군’이라고 새겨졌고, 뒤에는 그의 발자취를 소개한 비석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다.
평화공원은 2005년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 개최를 기념해 조성한 주민의 휴식 공간으로, 세계에서 하나밖에 없는 유엔군 묘지(유엔기념공원)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위트컴 장군은 유엔기념공원에 잠들어 있는 2천330위의 전몰장병 가운데 유일한 장성급이다.
그는 1894년 12월 27일 미국 캔사스주에서 태어났다. 대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하며 필리핀 선교사를 꿈꿨으나 1916년 ROTC 장교로 임관한 뒤 1차대전에 참전했다. 2차대전 때는 아이슬란드, 영국, 프랑스에서 복무했다.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에서 공을 세워 프랑스 제1무공훈장을 받았다.
그가 부산에 제2군수사령관(준장)으로 부임한 것은 한국전쟁 막바지인 1953년이었다. 그해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총성이 멎은 뒤에도 주둔지에 남아 폐허가 된 한국을 재건하는 데 힘썼다.
11월 27일 부산 중구 영주동 피란민 판자촌에서 시작된 불이 부산역까지 번졌다. 6천여 가구가 불에 타 29명이 숨지고 3만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긴급 상황이라고 판단한 위트컴 장군은 상급부대 승인도 받지 않은 채 군수창고를 열어 이재민들을 위한 천막을 짓고 음식과 의복을 나눠줬다.
이 일로 그는 본국으로 소환돼 연방의회 청문회장에 섰다. 권한 남용이라고 질타하는 의원들에게 “전쟁은 총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 국민을 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입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의원들은 기립박수로 공감과 경의를 표시하며 더 많은 군수품 지원을 약속했다.
위트컴 장군은 피란민과 전쟁고아를 치료할 의료시설들을 확충하는 데도 앞장섰다. 1950년 문을 연 가톨릭 의료기관 메리놀병원이 그의 도움으로 AFAK(미군대한원조) 기금을 받아 1954년 160병상을 갖춘 3층 건물을 완공한 것이 대표적이다. 건축비가 모자라자 휘하 장병들에게 ‘한국사랑기금’이란 이름으로 월급의 1%를 기부하자고 호소하는가 하면 한복 차림에 갓을 쓰고 거리에서 모금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성분도병원(현 부산성모병원)과 복음병원(현 고신대복음병원) 설립에도 기여했다.
그는 부산대가 수산대(현 부경대)와 분리되면서 캠퍼스 용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자 이승만 대통령과 경남지사를 설득해 금정구 장전동의 국유지 165만3천㎡(50만여 평)를 제공하도록 하는 한편 건축 자재를 지원하고 진입로를 닦았다. 피란민 후생주택 건립과 노약자 요양시설 마련 등에도 그의 손길이 미쳤다.
1954년 전역 후 잠시 고국에 머무는 동안 위트컴 장군은 주지사 후보에 거론될 만큼 인기가 높아 정계 진출을 권유받기도 했으나 이를 뿌리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미재단을 설립해 전쟁고아를 돕고 북한 지역의 미군 병사 유해 발굴 및 송환에 힘썼다. 1964년에는 충남 천안에서 아동보육시설 익선원을 운영하는 한국 여성 한묘숙 씨와 결혼했다.
위트컴 장군은 1982년 7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한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됐다. 익선원은 위트컴희망재단으로 이름을 바꿨다. 한묘숙 씨가 2017년 별세한 뒤 의붓딸 민태정 씨가 재단을 이끌고 있다.
정부는 장군의 40주기인 2022년 11월 8일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사흘 뒤 ‘유엔참전용사 국제추모의 날’에 한덕수 국무총리가 민태정 이사장에게 훈장을 전달했다. 이를 계기로 위트컴의 선행이 새롭게 알려지자 동상 건립을 위한 모금 운동이 펼쳐졌다. 부산시민 1만8천300명은 3억6천500만 원을 모아 그의 묘역 인근인 평화공원에 기념 조형물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