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의 결혼식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인 고종은 슬하에 9남 4녀를 두었다. 이 가운데 순종, 의친왕, 영친왕, 덕혜옹주 3남1녀만이 성인으로 성장했다. 일제는 자국의 황실과 조선 왕가의 융화를 도모하겠다면서 영친왕과 덕혜옹주를 잇따라 정략결혼시켰다. 영친왕의 배필은 메이지 천황의 조카인 황족 마사코(方子·이방자)였고, 덕혜옹주의 상대는 쓰시마의 백작 소 다케유키(宗武志)였다.

덕혜옹주는 1912년 궁녀 출신인 양귀인의 소생으로 태어났다. 2년 전 대한제국은 일본에 강제합병돼 황실은 왕실로 격하된 상태였다. 고종은 환갑을 맞는 해에 얻은 딸이어서 애지중지하며 키웠다. 틈만 나면 불러 재롱을 지켜보고 덕수궁 안에 유치원도 설립했다. 일제가 볼모로 데려간 뒤 정략결혼시킬 것이 걱정스러워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비밀리에 약혼을 시키려다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기도 했다.

우려는 곧 현실이 됐다. 일제는 1925년 덕혜옹주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귀족학교인 가쿠슈인 중등과 2학년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그는 일본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1926년과 1929년 이복오빠인 순종과 생모 양귀인이 잇따라 세상을 떠나자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다가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일제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1930년 네 살 위의 소 다케유키와 선을 보여준 뒤 이듬해 5월 8일 혼례를 올렸다. 다케유키 가문은 대대로 쓰시마 영주를 지냈다. 쓰시마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로 올라와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도쿄제국대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친구들과 문학 동인지를 만들며 많은 시를 남겼고 그림에도 재능을 보였다.

일본인 사이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신랑감이었으나 일제의 의도를 간파한 조선인들은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쓰시마가 왜구의 거점인 데다 다케유키의 선조가 임진왜란 때 길잡이 역할을 한 것도 악감정을 부추겼다. 신랑이 키도 작고 꼽추에 절름발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조선일보가 결혼식 소식을 보도하며 신랑 쪽을 잘라내고 신부 사진만 싣자 소문을 사실로 믿는 사람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이들의 결혼 생활이 순탄해 보였다. 1932년 8월 14일 딸 마사에(正惠·정혜)도 태어났다. 그러나 산후 우울증이 겹쳐 덕혜옹주의 조현병 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부부 사이도 소원해졌다. 레이타쿠대 영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다케유키는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며’라는 장문의 시를 남기기도 했으나 당시 의술 수준과 시대적 상황에 비춰볼 때 치료를 위해 그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다케유키는 딸을 끔찍이 아꼈다. 조선 왕실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데리고 가는가 하면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신헌법에 따라 신분제가 폐지돼 귀족 지위를 잃자 생활도 어려워졌다. 덕혜옹주 오빠인 영친왕과 합의해 1955년 이혼한 뒤 대를 잇기 위해 일본 여성과 결혼해 2남2녀를 낳았다. 딸 마사에는 와세다대 동문과 결혼했으나 1956년 유서를 남기고 실종됐다.

덕혜옹주는 1962년 대한민국으로 영구귀국해 올케인 이방자 여사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살았다. 다케유키는 1972년 서울을 방문해 덕혜옹주를 만나려고 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혼 후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는 1985년과 1989년 둘 다 똑같은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