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최근 달러·원 환율이 1400원대를 훌쩍 넘어 1500원 선까지 넘보는 고공행진을 지속하고 있다. 과거에는 환율 급등을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했지만, 지금은 고환율 '뉴노멀(New Normal)' 시대로의 진입을 시사하며 한국 경제에 심각한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올해 들어 11월 말까지 평균 환율은 1415원 정도로 외환 위기 당시인 1998년 1394원,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276원보다 높았다. 사상 최대 규모의 경상수지 흑자와 높은 대외 신인도에도 환율이 국가부도 위기 때보다 높은 수준으로 치솟은 것이다. 환율은 한미 관세협상 타결 이후 하락하는 듯했으나 그 흐름은 오래가지 못했다. 통상에 대한 불확실성은 해소됐지만 원화 약세 압력은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주 열린 금년 마지막 금통위에서도 고환율에 대한 부담으로 4차례 연속 금리를 동결했다. 11월 30일 IMF는 한국의 금년 GDP 성장률을 달러 기준으로 마이너스(0.9%)를 기록할 것으로 추산했다.

더욱 심각한 건 지난달 기준으로 원화의 실질 가치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으로 추락했다는 점이다. 실질실효환율 지수는 89.09로, IMF 구제금융을 받던 1998년(86.63)과 비교해도 크게 높지 않은 수준이다. 실질실효환율 지수가 낮으면 국제교역에서 원화가 지닌 구매력이 그만큼 떨어졌다는 의미다.

한국 경제는 원유, 곡물 등 핵심 원자재의 수입 의존도가 매우 높기 때문에 고환율은 수입 물가를 급속히 상승시킨다. 원자재 수입 단가 상승은 기업의 생산 비용을 높이고, 이는 최종적으로 소비자 물가에 반영되어 고물가를 유발한다. 소득은 그대로인데 생활비가 늘어나면서 실질적인 가계 구매력이 감소하게 된다. 이는 서민 경제를 가장 크게 위협하는 요소이며, 소비 심리를 위축시켜 내수 경기 침체를 가속화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된다. 결국 고환율로 인한 가장 심각한 타격은 일반 서민들이 받게 되는 것이다.

과거 고환율의 수혜를 입었던 수출 기업조차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인해 원가 부담이 커지면서 마진이 축소되고 있다. 특히 정유, 철강, 항공 등 외화 결제 비중이 높은 업종은 고환율의 직격탄을 맞고 있다. 얼마 전까지 달러·원 환율 상승은 전통적으로 수출 대기업에게 호재라는 공식이 있었다. 국내에서 생산한 제품을 해외에 판매하는 구조에서는, 환율 상승은 곧 수익성 증가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이 공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거나, 오히려 고환율이 수출 기업에도 재무 부담을 안겨주는 상황이 되었다. 핵심적인 이유는 기업의 구조적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해외 공장에서 생산해 현지 통화로 판매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이다. 대표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배터리 3사의 경우 국내 수출 물량은 전체 생산능력의 6.4%에 불과하며, 대부분을 해외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들의 해외 투자가 급증한 것도 수출 기업이 고환율의 수혜를 입지 못하는 이유다. 이러한 해외 투자는 대부분 해외에서 벌어들인 달러로 충당하지만, 부족한 자금은 '달러 빚'으로 메꿔야 한다. 이 때문에 환율이 10% 상승하면 배터리 3사의 원화 환산 투자금은 1조 원 이상 늘어나는 등 해외 투자비 부담이 커진다. 장비 및 원료 수입이 많은 반도체 업계 역시 고환율에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다. 참고로 한국은행 자료에 따르면 9월 말 기준으로 기업의 해외 투자 규모는 9067억 달러, 국민연금 해외 투자는 5140억 달러, 서학개미는 1963억 달러를 투자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기업들이 수출을 할 때, 환 헤지(hedge)를 통해 환율 리스크를 미리 관리하는 것이 일반화됐기 때문에 환율이 올라가도 환차익이 없다. 환 헤지는 환율이 떨어질 때 손실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율이 올라도 환차익은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현대차와 기아와 같은 완성차 업체처럼 국내 협력사에서 원화로 부품을 구입하고 해외에서 달러로 판매대금을 받는 일부 업종에는 환율 상승이 여전히 호재로 작용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고환율 자체가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 약화, 즉 낮은 성장률과 투자 위축의 한 징표로 해석되면서 원화 가치의 하락 압력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지난주 정부는 기획재정부, 복지부, 한국은행, 국민연금이 참여하는 '4자 협의체' 가동에 들어갔다. 환율 조정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것 아니냐는 시각에 대해 선을 그었지만, 국민연금이 해외 투자를 할 때, 환헤지를 하여 가급적 달러 수요를 줄이는 방안과 변동성이 커지면 해외 자산을 매각해 국내 시장에 달러를 공급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다. 이 경우 국민의 노후자금이 환율 압력을 완화하는 데 어느 선까지 나서야 하는지, 또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달러·원 환율은 기본적으로 달러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되지만,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요인이 작용한다. 최근 원화 약세는 글로벌 요인과 한국 고유의 구조적인 달러 수요 증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미국이 금리 인하나 유동성 확대를 통해 달러 약세를 유도하더라도,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지정학적 리스크(전쟁, 미·중 갈등 등)나 경기 불확실성이 커지면 안전자산으로 인식되는 '미국 달러'를 선호하게 된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고환율 장기화는 단순히 미국 금리 정책이나 대외 불확실성만의 문제가 아니다. 미국과의 금리 차가 여전히 원화 약세에 한몫하고 있는 가운데, 가장 큰 구조적 요인은 국내 기업 및 개인의 해외 투자 증가와 수출 대금의 비환전이다. 과거에는 경상수지 흑자가 달러 공급을 늘려 환율 하락 압력으로 작용했지만, 최근에는 달러를 사서 해외로 보내는 규모가 이 흑자 효과를 상쇄하거나 능가하고 있다.

주식 투자로 인한 순유출액과 기업의 대미 직접 투자 규모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며, 구조적으로 국내에서 해외로 나가는 달러 수요가 급증한 것이다. 이는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 약화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더 높은 수익률을 찾아 해외 자산으로 자금이 이동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지난달 개인 투자자가 해외주식에 투자한 규모는 68억 달러로, 같은 기간 무역수지 흑자 60억 달러보다 큰 규모다. 개인 달러예금 잔액도 올해 들어 최대치를 기록했다.

또한 수출 대기업들이 벌어들인 달러를 국내에서 환전하지 않고 달러 예금 형태로 쌓아두는 '레깅 전략(Legging Strategy)'을 취하는 경향이 커졌다. 레깅은 외환 결제 시점을 의도적으로 조절하여 환율 변동의 위험을 회피하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환율 위험 관리 전략이다. 고환율이 더 오래 지속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원화 환전을 늦추면서 외환 시장의 달러 공급 부족을 심화시키고 있다. 레깅으로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규모는 9월 말 현재 918억 달러에 달한다.

환율이 급등락 할 경우 지금까지는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 속도와 방향을 조절해 왔지만, 이제는 과거처럼 단기적인 시장 안정 관리만으로는 문제를 풀 수 없는 뉴노멀 시대에 접어들었다. 외환시장을 둘러싼 환경이 과거와 크게 달라졌기 때문에, 단기 처방이 아닌 중장기 구조개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기업의 생산성과 자본수익률을 높이기 위한 혁신과 더불어, 해외 투자 쏠림 현상 완화, 수출 기업의 환전 유도 방안, 외국인 투자 유치 확대 등 구조적 접근으로 '환율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 특히, 관세 협상에 따른 외환 수급 관리 방안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

고환율의 뉴노멀 시대, 한국 경제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고 대비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다. 이제는 원화 가치 하락이 수출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낡은 공식을 깨고, 구조적 변화에 맞는 새로운 정책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할 때다.

출처 머니투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