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인 한국 귀화 1호인 민병갈(칼 페리스 밀러)
충남 태안반도는 경치가 빼어나고 백사장이 발달해 찾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태안의 명소 가운데 하나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에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수목원 천리포수목원이다.
이곳을 가꾼 이는 미군 장교 출신의 귀화 한국인이다. 1979년 서양인 최초로 대한민국 국적자가 됐다. 본명은 칼 페리스 밀러. 한국에서 형제처럼 가깝게 지낸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의 성과 돌림자를 따고, 끝 자는 자신의 이름 ‘칼’과 비슷한 발음의 글자를 골라 민병갈이란 한국 이름을 지었다.
그는 1921년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웨스트피츠턴에서 태어나 버크넬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해군정보학교에서 일본어 과정을 이수하고 1945년 6월 일본 오키나와에 배치돼 일본군 포로와 종군위안부를 신문했다. 광복 후 미국 군정청에 부임했다가 한국의 인심과 풍광에 이끌려 한국 근무를 자원했다. 미국의 경제협조처(ECA)와 국제협력처(AID)에서 일한 인연으로 1953년 한국은행이 상근고문으로 위촉하자 눌러앉았다.
민병갈은 군정청에서 만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을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전역할 때 그의 권유에 따라 가진 돈을 몽땅 유한양행 주식에 투자해 목돈을 모았고, 이를 종잣돈 삼아 주식 투자로 번 돈을 수목원에 쏟아부었다.
민병갈은 여름휴가 때마다 태안의 만리포 해수욕장을 즐겨 찾았다. 1962년 인근 천리포에 들렀다가 딸의 혼수 비용이 필요하니 바닷가 야산을 사 달라는 마을 노인의 부탁을 받았다. 딱한 사정을 외면할 수 없어 2만㎡(약 6천 평)의 땅을 사들인 게 시작이었다. 소문을 들은 주민들이 내 땅도 사 달라고 졸라대자 매입한 뒤 1970년 수목원 조성 공사에 나섰다.
그는 금요일 오후만 되면 천리포에 내려와 월요일 새벽 서울로 다시 출근할 때까지 나무를 심고 숲을 가꿨다. 드넓은 수목원 구석구석을 돌며 삽과 호미질을 했고, 식물도감을 뒤져 나무와 풀의 학명을 모두 외웠다. 미국 나무 경매장에도 해마다 한두 차례씩 들러 신품종 묘목과 종자를 사들였다.
민병갈은 자식처럼 키운 나무에 상처를 줄 수 없다며 인위적으로 나무를 보기 좋게 다듬는 것을 싫어했다. 수목원 직원들은 “나무를 지켜만 주고 주인 노릇을 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고 한다. 농약과 기계를 쓰지 않는 것도 원칙이고, 철저한 기록과 관리로 정평이 났다. 1982년 완도호랑가시나무를 발견해 국제학회에 등록하는가 하면 새로운 목련 품종을 잇따라 개발하는 등 학문적 성과도 적지 않다.
이 같은 공적을 인정받아 1974년 산림청장 감사패, 1989년 영국왕립원예협회 공로메달, 1992년 국제목련학회 공로패, 1996년 환경부장관상, 1999년 한미우호상, 2000년 국제수목학회 공로패와 미국호랑가시나무학회 공로패, 2002년 금탑산업훈장 등을 받았다. 경기도 포천 광릉의 국립수목원 '숲의 명예전당'에도 박정희·현신규·임종국·김이만에 이어 2005년 5번째로 헌액됐다.
2000년 국제수목학회는 천리포수목원을 세계에서 12번째,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세계의 아름다운 수목원’에 선정했다. 환경부는 2006년 천리포수목원을 멸종 위기종인 가시연꽃·노랑무늬붓꽃·망개나무·매화마름·미선나무의 보전기관으로 지정했다.
2009년 전까지 천리포수목원은 사전에 허락받은 식물연구자나 후원회원만이 들어올 수 있는 ‘금단의 비밀정원’이었다. 2007년 12월 기름 유출 사고로 태안이 큰 피해를 보자 지역경제에 도움을 주고 일반인에게도 자연과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자는 취지로 개방을 결정했다.
밀러가든·에코힐링센터·큰골·남새섬·목련원·침엽수원·종합원 7개 구역으로 나뉘는 천리포수목원에는 목련 926종, 호랑가시나무 566종, 동백나무 1096종, 무궁화 371종, 단풍나무 251종 등 1만6872종의 식물이 자라고 있다. 단연 국내 최다로 경기도 포천시 광릉 국립수목원의 갑절을 넘는다.
총넓이 58만9429㎡(약 17만8천 평) 가운데 일반인이 둘러볼 수 있는 곳은 6만5623㎡(약 2만 평) 규모의 밀러가든과 에코힐링센터 등 일부 지역이다. 민병갈의 일대기와 유품을 전시해놓은 민병갈기념관과 밀러가든 갤러리도 들어서 있다.
민병갈은 한복과 한식을 즐겼고,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고아 4명을 입양해 키웠다. ‘파란 눈의 나무 할아버지’란 별명처럼 나무를 사랑해 “내가 죽으면 무덤을 쓰지 말고 그 자리에 나무 한 그루라도 더 심으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2002년 4월 8일 노환으로 별세하자 유족과 천리포수목원 임직원들은 차마 유언을 따를 수 없어 완도호랑가시나무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가 2012년 유골을 수습해 뼛가루를 고인이 아끼던 태산목(목련과 나무의 한 종류) 아래 수목장으로 안치했다. 묘터에는 작은 표지석을 설치하고 태산목 앞에는 흉상과 비석을 세웠다.
흉상 앞을 비롯한 수목원 곳곳에는 청개구리 조각상이 눈에 띈다. 그는 고향에서 아들과 함께 살고 싶었던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을 외면한 것이 늘 죄스러웠다. 엄마 말 안 듣는 청개구리 우화를 빗대 “내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면 청개구리가 될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천리포수목원 청개구리는 민병갈의 환생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