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성 최초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 벅'
펄 벅은 1931년 소설 ‘대지(The Good Earth)’를 발표하고 1933년 ‘아들들(Sons)’과 ‘분열된 일가(A House Divided)’를 잇따라 펴내 3부작을 완성했다. 중국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농민 왕룽과 오란 부부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 작품으로 1932년 퓰리처상에 이어 1938년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다. 여성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세계에서 4번째로 유럽을 제외한 대륙에선 처음이었다. ‘대지’는 세계 각국에서 번역 출간됐고 영화로도 꾸며져 인기를 끌었다.
벅은 1892년 6월 26일 미국 웨스트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지 3개월 만에 개신교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이주했다. 1910년 미국으로 건너가 랜돌프 매콘여대를 졸업한 뒤 1914년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1917년 농업경제학자 존 로싱 벅과 결혼했으나 가정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지적장애를 지닌 외동딸 캐롤을 치료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데도 남편은 무심했다. 고통을 잊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해 1930년 ‘동풍 서풍’을 선보였다. 1949년에는 입양기관 웰컴하우스를 만들어 사회사업에도 뛰어들었다.
벅은 한국을 무대로 한 소설 ‘살아 있는 갈대(The Living Reed)’도 펴냈다. 한미 수교가 이뤄진 1882년부터 1945년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기까지 4대에 걸쳐 국권을 되찾으려고 헌신한 안동 김씨 일족의 이야기다. 1963년 영어와 한국어로 동시 출간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최고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벅은 한국을 소재로 한 소설을 두 편 더 발표했다.
그는 중국에 있을 때 만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의 정신적 뿌리를 확인하고자 한국을 찾았다가 더 큰 감명을 받아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미국과 중국에서 식품기업과 제약회사를 세워 독립운동 자금을 댔던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이 모티브였다.
벅이 1960년 경북 경주의 농촌 마을에서 겪은 일화가 있다. 한 농부가 지게에 볏단을 진 채 소달구지를 몰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달구지에 올라타고 볏단까지 실으면 편할 텐데 왜 사서 고생하는 거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농부는 “오늘 우리 소는 종일 밭을 가느라 힘들었으니 집에 돌아갈 때라도 좀 가볍게 해줘야 하지 않겠소?”라고 대답했다. 벅은 가축의 고단함까지 헤아릴 줄 아는 농부의 마음에 탄복했다.
벅은 감나무 끝에 매달린 감 10여 개를 보고 “따기 힘들어 그냥 놓아둔 것이냐”라고 묻자 “먹을 것이 부족한 겨울새들을 위해 남겨둔 까치밥”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또다시 탄성을 지르며 “이것만으로도 나는 한국에 잘 왔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살아 있는 갈대’ 첫머리에 이렇게 썼다.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다. 이 나라는 주변의 세 나라-중국·러시아·일본-에는 여러 세기 동안 잘 알려져 있어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나 서구 사람들에겐 아시아에서도 가장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소설 곳곳에도 “조선인들은 대단히 긍지가 높은 민족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사사로운 복수나 자행할 사람들이 아니었다”라거나 “갈대 하나가 꺾였다 할지라도 그 자리에는 다시 수백 개의 갈대가 무성해질 것 아닙니까?”처럼 한국인을 향한 경의와 애정이 묻어나는 대목이 등장한다.
벅의 한국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964년 평생 모은 돈의 대부분인 700만 달러를 희사해 미국에서 펄벅재단을 만들고 이듬해 한국을 시작으로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태국, 베트남에 차례로 지부를 설립해 혼혈 고아들을 보살폈다. 고아들의 입양을 주선하고 자신도 7명을 양자로 들였다.
중국에서 오래 생활해 미군 장병과 아시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아메라시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기도 했으나 이들이 가부장적 분위기 탓에 버려지거나 천대받기 일쑤여서 더 애정을 쏟았다. 벅은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아이들”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도 “앞으로 500년 뒤엔 모든 인류가 혼혈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기도 했다.
1967년 6월에는 유일한이 기부한 경기도 부천시 심곡동 유한양행 소사공장 터 3만3천58㎡(약 3만 평)에 보육원 소사희망원을 세웠다. 훗날 벅은 “수백 명의 아메라시안 아이가 참석한 개원식 날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했다.
1975년 문을 닫을 때까지 소사희망원에는 2천여 명의 혼혈아가 거쳐 갔다. 록밴드 ‘함중아와 양키스’의 멤버 함중아와 정동권도 이곳 출신이다. 벅은 1960년부터 1969년까지 8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올 때마다 몇 달씩 머물며 손수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였다.
한국펄벅재단은 지금도 다문화가정 자녀 지원사업 등을 펼치고 있다. 부천시는 소사희망원 자리에 2006년 부천펄벅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살아 있는 갈대’ 초판본, 80회 생일 때 소사희망원 출신들에게서 선물받은 산수화, 타자기, 가방, 머리핀 등 유품 25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펄벅문학상 공모, 그림 그리기 대회, 문화예술 교육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운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