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의 외국인 묘역. 왼쪽이 강혜림, 오른쪽이 위서방의 무덤이다.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는 18만여 위의 국가유공자 유해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 가운데 외국인 무덤은 3기뿐이다. 3·1운동을 돕고 제암리 학살 사건을 알린 캐나다 출신 의료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종군 화교 위서방(웨이쉬팡)과 강혜림(장후이린)이 그 주인공이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의 홍군이 중국 국공내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을 수립했다. 국민당 정부의 중화민국(자유중국)은 대만(타이완)섬으로 쫓겨갔다. 이듬해 6.25가 발발하자 자유중국의 장제스 총통은 본토를 수복할 기회로 여기고 군대 파병을 제안했다. 미국은 중공군 개입을 우려해 거절했으나 자유중국을 지지하던 국내 화교들은 자발적으로 참전했다.
위서방은 1923년 중국 랴오닝성의 국경도시 단둥에서 태어났다. 압록강 건너 신의주에 살다가 1945년 단둥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국공내전에 국부군 대위로 참전했다. 국부군이 패배한 뒤 신의주로 돌아와 평양 인근 장산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1949년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결성해 단장을 맡고 있던 중 국군이 평양에 진주하자 백선엽 육군 1사단장을 찾아가 참전 의사를 밝혔다.
한중반공애국청년단 부단장이던 강혜림도 국부군 소속으로 홍군과 전투를 치른 경험이 있다. 1925년 산둥성 치샤현 태생으로 평양에서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다가 1950년 11월 국군에 입대했다.
위서방은 한중반공애국청년단을 평양화교반공애국보위단으로 재편해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육군 15연대에 배속된 뒤 부대 이름을 중국인특별수색대로 바꿨다. 중공군이 참전하자 이들의 역할이 늘어났다. 중공군과 싸운 경험이 있고 중국어에 능통하다 보니 적군의 동향 탐지나 포로 심문 등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위서방이 이끄는 중국인특별수색대는 1950년 12월 24일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에서 중공군 4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려 중공군이 처음 38선 이남까지 진출했다는 증거를 확인했다.
경기도 고양군 녹번리(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전투에서 적진 깊숙이 침투했다가 왼쪽 가슴과 오른쪽 다리에 박격포탄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대구 육군병원에 후송돼 4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공로로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위서방은 전쟁이 끝난 뒤 한의사가 됐다. 강원도 강릉에서 극빈자를 무료 진료하고 장학사업에 앞장서다가 1989년 6월 25일 별세했다. 정부는 그해 12월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1990년 3월 20일 국립서울현충원 제12묘역에 안장했다.
강혜림은 중국인특별수색대 부대장이었다. 1951년 1월 말 국군 15연대는 서울을 되찾기 위해 경기도 안성에서 과천까지 밀고 올라갔다. 그러나 중공군이 관악산 주요 봉우리에 진지를 구축해놓아 돌파가 쉽지 않았다.
강혜림은 중공군으로 위장해 적진에 침투했다. 적의 진지 8곳을 격파하는 눈부신 활약 속에 마침내 국군은 관악산을 점령할 수 있었다. 강혜림은 실탄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백병전을 벌이던 중 적군의 총탄을 맞고 27세의 나이로 1951년 2월 2일 숨졌다. 1959년 은성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그는 살던 곳이 평양이어서 유해를 인수할 유족도 없었다. 부산 화교소학교에 임시 안치했다가 주한 자유중국대사관과 화교 전우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964년 12월 12일 당시 국립묘지 제24묘역에 안장했다. 외국인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로 스코필드보다 6년 앞섰다.
둘의 무덤은 떨어져 있었으나 화교들의 건의에 따라 2012년 5월 15일 강혜림 무덤을 위서방 무덤 옆으로 이장, 별도의 외국인 묘역으로 꾸몄다. 전쟁터에서 생사가 엇갈린 전우가 호국 영령으로 만난 것이다. 해마다 5월 15일에는 주한 타이베이대표부와 한성화교협회 관계자들을 비롯한 국내 대만계 화교들이 외국인 묘역 앞에 모여 6·25 참전자 추모식을 개최한다.
이들 말고도 기억해야 할 화교들이 있다. 중공군과의 전투가 늘어나자 국군은 1951년 3월 육군첩보부대(HID) 산하에 정식 중국인부대인 4863부대, 일명 SC지대를 창설했다. 서울 차이니즈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다. 중화민국은 훈련을 맡고 부대를 이끌 현역 장교를 파견했다.
부대원 가운데는 중공군 포병 교관으로 참전했다가 탈영해 한국군에 귀순한 나아통(뤄야퉁)도 있다. 장제스가 교장이던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국공내전에서 홍군의 포로가 돼 중공군에 배속됐다. SC지대는 경기도 문산과 서울 사직공원에서 10주간 훈련받은 뒤 강화도에 딸린 최북단 교동도에 본부를 두고 특수작전을 수행했다.
대원 200명 가운데 무장대원 70여 명은 적 후방에 침투해 첩보 수집, 요인 납치, 시설 파괴 등에 나섰다. 이들은 유창한 중국어와 한국어 실력을 무기로 중공군을 만나면 북한 인민군으로 행세하고, 인민군을 만나면 중공군인 척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후방에서 포로 설득과 심문, 선무 방송, 심리전 등을 맡았다.
그러나 무장대원 중에 4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는 큰 희생을 치르고도 외국인이어서 대부분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육군 6사단 HID 제6지대의 오중현(우종시앤) 대원에게 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되고, 1971년 12월 53명이 종군기장, 1975년 9월 10명이 보국포장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