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


충남 아산시 인주면의 공세리성당은 우리나라에서는 다섯 번째,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첫 번째로 세워진 유서 깊은 성당이다. 충남도 지정문화재 144호로 올해 준공 103년을 맞는다.
건물 자체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수백 년 수령의 고목들이 어우러진 주변 풍경과 아산만이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빼어나 순례객은 물론 관광객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2005년 한국관광공사는 이곳을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선정했으며, ‘태극기 휘날리며’와 ‘아이리스2’ 등을 비롯한 70여 편의 영화와 TV드라마를 여기서 촬영했다.

공세리성당의 초기 역사는 에밀 피에르 드비즈 신부와 함께한다. 세례명은 에밀리오, 한국식 이름은 성일론(成一論)이다. 그는 초대와 3대 주임신부로 35년간 재직하며 성당 건물을 짓고 신도를 모으고 주민들을 보살폈다.

그는 1871년 7월 14일 프랑스 남부 아르데슈 투르농의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롱르소니에 선교학교와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를 거쳐 1894년 7월 사제로 서품됐다. 그해 8월 29일 파리를 출발해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10월 23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서울 명동성당의 뮈텔 주교에게 입국 신고를 한 뒤 조선어 공부를 시작했다. 1895년 1월 하우고개(지금의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하우현성당)로 파견돼 30여 명의 신자와 생활하다가 6월 공세리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1년 만에 서울주교관 사무국장으로 발령이 났으나 기낭 2대 주임신부가 공주로 옮겨가면서 1897년 돌아왔다.

공세리(貢稅里)에는 세곡(稅穀)을 운반하던 창고가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드비즈 신부는 이곳의 창고 터를 사들여 1899년 ‘ㅁ’자 형태의 한옥 성당을 건축했다. 그 뒤 신도가 늘어나자 설계와 공사 감독까지 맡아 1922년 고딕 양식의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했다. 충청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공세리성당은 나중에 지어진 합덕성당(1929년), 예산성당(1934년), 공주 중동성당(1936년) 등의 전범이 됐다.

드비즈 신부는 성당을 운영하고 서울과 인천의 수녀원·보육원을 지원하기 위해 주변 토지를 사들였다.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4할 이하의 적은 소작료를 매기자 많은 농민이 신자가 됐다. 성당에는 학교도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제관을 개보수한 공세리성지박물관에는 ‘이명래 고약(李明來 膏藥)’ 상표와 광고 만화를 담은 벽화가 등장한다. 이명래 고약은 종기나 부스럼 등 피부질환 부위에 붙이는 약으로 인기가 높아 1970년대까지 전국 가정의 상비약이었다.

고기를 먹기 힘들고 위생 상태가 열악한 예전에는 종기를 비롯한 피부병이 만연했다. 성당 건축에 참여한 인부와 인근 주민 가운데서도 종기로 고생하는 사람이 많았다. 드비즈 신부는 중국에서 접한 한의학 지식과 라틴어로 된 약용식물학 책에서 본 내용을 응용, 붙이는 연고 형태의 고약을 만들어 무료로 나눠줬다. 사람들은 ‘성일론 고약’이라고 불렀다.

서울에 거주하던 이명래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아산으로 내려갔다가 공세리성당에서 드비즈 신부를 만나 고약 제조술을 배웠다. 성일론 고약에 민간요법을 더해 1906년 이명래 고약을 개발했다. 아산에서 명래한의원을 개업했다가 1920년 서울 중림동을 거쳐 충정로로 옮겼다. 명래한의원은 1952년 이명래가 뇌출혈로 숨진 뒤 둘째 사위 이광진과 그의 사위 임재형이 차례로 물려받아 운영했으나 2011년 문을 닫았다. 막내딸 이용재가 세운 명래제약도 2002년 폐업했다.

드비즈 신부는 1930년 청력이 떨어져 공세리성당 주임신부에서 물러났다. 서울교구청으로 자리를 옮겨 교회 건축과 관련된 일을 맡았다. 1932년 건강이 악화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듬해 8월 세상을 떠나 고향인 투르농 랑프스성당 지하 묘소에 묻혔다.

공세리성지박물관에는 프랑스에 있는 묘지석을 재현했다. 묘지에서 가져온 흙, 신부의 종손자가 기증한 금장 ‘드비즈 서간집’, 건축 당시의 성당 사진, 고약 제조 도구 등도 만날 수 있다. 박물관 뒤에는 드비즈 광장을 조성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