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자 여사

윤학자(尹鶴子)의 본명은 다우치 지즈코(田內千鶴子)다. 조선인 남편 성을 따르고 일본식 이름 뒷글자를 한국식으로 읽은 것이다. 1912년 10월 31일 일본 시코쿠섬 남부 고치현에서 태어났다가 1919년 조선총독부 목포시청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 현해탄을 건너왔다.

목포고등여학교 졸업반이던 1930년 아버지가 급사했으나 조산원으로 일하는 어머니와 함께 조선에 남았다. 1932년부터 미국 남장로회가 세운 목포 정명여학교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중 고교 은사에게서 제안을 받았다. 공생원(共生園) 원장 윤치호가 일본어 교사로 봉사할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도와주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다.

다우치보다 세 살 많은 윤치호는 전남 함평의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찢어지게 가난해 학교 문턱도 넘지 못하고 14살 때 아버지까지 여의었으나 여선교사 줄리아 마틴의 도움으로 서울의 피어선성경학교(현 평택대)를 졸업했다. 목포 양동교회 전도사로 일하다가 유달산 자락에 보육시설을 짓고 고아들을 거두어 길러 ‘목포의 거지 대장’이라고 불렸다.

다우치는 교사 역할에만 머물지 않고 고아들을 직접 씻기고 먹였다. 둘은 곧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윤치호 어머니는 “양반 집에서 일본인 며느리를 들일 수 없다”면서 식음을 전폐한 채 반대했다. 다우치의 친척과 친구들도 “미쳤구나”라며 만류했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다우치의 어머니만 “하늘나라에는 일본인 조선인 구별도 없다. 네가 사랑한다면 결혼을 말리지 않겠다”며 격려했다.

공생원 창립 10주년 기념일인 1938년 10월 15일, 지금의 목포상공회의소가 있는 목포 공회당에서 일본인교회 후루가와 목사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목포 거지 대장이 총독부 일본인 관리의 딸과 부부가 된 것은 전국의 화제가 됐다.

1945년 해방을 맞자 윤치호는 친일파로 몰리고 윤학자는 원수 나라의 여자로 낙인찍혔다. 윤학자는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공생원 원생과 목포 시민들이 나서 이들 부부를 변호했다. 이에 용기를 얻어 윤학자는 공생원으로 돌아왔다.

1950년 6·25가 터져 또 시련이 닥쳤다. 북한군이 목포에 진입하자 부부는 “고아들을 버려두고 도망칠 수 없다”며 공생원을 지켰다. 북한군은 윤치호를 붙잡아 “일본인 아내를 둔 친일파에다 미국 선교사의 앞잡이 노릇을 했고, 이승만 괴뢰정권에서 목포 구장(區長)을 지낸 반동분자”라며 인민재판에 회부했다.

공생원 원생과 시민들은 “고아를 위해 헌신한 이들 부부를 처형하려면 우리를 먼저 죽여라”라고 버티며 구해줬다. 북한군이 물러간 뒤엔 부역자로 지목돼 구속됐으나 이때도 공생원 원생과 주변 인사들의 구명운동 덕분에 풀려났다.

윤치호는 전쟁통에 공생원 원생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자 1951년 식량을 구하러 광주로 향했으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전남도청 담당자를 만나 긴급구호를 요청한 뒤 여관에 묵었다가 건장한 청년들에게 끌려갔다는 게 마지막 목격담이었다. 빨치산에게 희생됐을 것이란 소문이 무성했다.

이때부터 윤학자는 윤치호의 빈자리까지 메우며 공생원 식구 300여 명을 혼자 돌봐야 했다. 어머니가 사는 일본으로 돌아가라는 권유도 많았지만 “남편을 기다려야 하고 아이들을 버려둘 수도 없다”며 거절했다. 아이들을 먹이고 입힐 것을 구하느라 리어카를 끌고 다니는가 하면 결혼 때 일본에서 가져온 오르간과 기모노 등도 팔아치웠다.

친자식 4남매도 원생들과 똑같이 길렀다. 맏아들 윤기 씨는 저서 ‘어머니는 바보야’에서 “난 고아도 아닌데 왜 이런 대접을 받고, 일본인 자식이란 놀림까지 당하며 살아야 하나”란 생각으로 원망도 많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정부는 윤학자에게 1963년 문화훈장을 전달했다. 소다 가이치 전도사에 이어 일본인에게는 두 번째였다. 일본 정부도 1967년 남수포장(藍綬褒章)을 수여했다. 목포시가 1963년 시민의 상을 제정하며 시민 대상 설문조사를 벌였을 때 압도적으로 그가 수상자감 1위에 꼽혔다. 목포시는 1회 조희관, 2회 박화성에 이어 3회 때 허건과 함께 윤학자에게 시상했다.

1968년 10월 31일 폐암으로 세상을 떠나 남편의 고향인 함평에 묻혔다. 11월 2일 최초의 목포 시민장이 치러지자 당시 인구가 16만여 명이던 목포에서 3만 명이나 되는 조문객이 몰렸다. 언론들은 “목포를 울린 장례, 3만 조객의 슬픔을 뒤로 하며 ‘고아의 어머니’ 윤학자 여사 떠나시다”라고 보도하며 고인을 추모했다.

윤학자가 기른 고아는 모두 3천 명. 현재 공생원은 윤기 씨를 비롯한 자녀와 사위, 손녀 등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다. 목포와 서울에 어린이집, 장애인요양원, 재활원, 자립원, 기술교육원 등도 개설했다. 일본에선 도쿄·오사카·교토·고베 등지에 재일동포 독거노인 쉼터 ‘고향의 집’을 꾸려가고 있다.

1995년에는 윤학자 부부의 이야기를 다룬 한일 합작영화 ‘사랑의 묵시록’이 만들어졌고 TV 다큐멘터리로도 꾸며졌다. TV 프로그램을 보고 감동한 오부치 게이조 일본 총리가 “우메보시(일본식 매실장아찌)를 먹고 싶다”는 윤학자의 유언을 들어주기 위해 매화의 고장으로 이름난 자신의 고향 군마현의 매화나무 20그루를 2000년 3월 공생원에 기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