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서 '한국의 야생동물지'를 펴낸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
1935년 2월, 스웨덴의 동물학자이자 오지 탐험가인 스텐 베리만이 시베리아횡단열차와 경의선 등을 갈아타고 13일 만에 지금의 서울역인 경성역에 도착했다. 고고학 등에 관심이 많던 스웨덴 왕세자 구스타프 6세의 부탁을 받고 한국의 야생동물을 잡으러 온 것이다.
구스타프 부부는 1926년 일본을 국빈 방문했다가 경주에서 신라 고분 발굴을 참관하며 봉황 모양의 장식이 달린 금관이 출토되는 광경을 지켜봤다. 이 고분은 스웨덴의 한자식 이름인 서전(瑞典)의 ‘서(瑞)’와 봉황의 ‘봉(鳳)’을 따 서봉총이라고 명명됐다.
당시 한반도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에 금강산도 들렀다. 한국의 자연에 매료된 그는 스웨덴 왕립자연사박물관에 한국관을 개설하기로 하고 이곳에 전시할 야생동물 수집 임무를 베리만에게 맡긴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선교나 여행 등의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방문한 서양인은 많았지만 야생동물 포획을 위해 한국을 찾은 서양인은 베리만이 유일했다.
베리만은 스웨덴의 작은 마을 란세테르에서 태어나 스톡홀름대에서 동물학, 식물학, 교육학 등을 공부했다. 캄차카반도, 쿠릴열도, 뉴기니 등 동아시아 오지를 탐사하며 ‘3년간의 캄차카 탐사 여행기’, ‘극동 지역의 수천 개의 섬’, ‘쿠릴열도의 새’, ‘유명한 탐험여행’, ‘멀리 떨어진 나라로부터’, ‘비록 나의 아버지가 식인종일지라도’ 등의 저서를 펴냈다.
박제사 훼크비스트까지 대동하고 온 그는 구스타프의 후원과 일본의 비호 아래 전국을 누비며 야생동물을 마음껏 잡았다. 러시아의 일급 사냥꾼 얀콥스키와 일본인 포수 요시무라에 조수 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 등을 고용하고 동원한 말만 40필에 이르렀다. 일본은 마적들의 습격을 우려해 관동군까지 붙여 호위하도록 했다.
압록강 유역과 백두산·지리산 일대를 조사하기도 했고 제주도까지 건너가 야생동물을 포획했다. 희귀한 짐승을 잡으면 현지에서 박제한 뒤 곧바로 스웨덴으로 보냈고, 일부는 베리만이 한국을 떠날 때 산 채로 가져갔다. 최신형 장총을 주로 사용했으며 한국 전통 방식의 매사냥을 체험하기도 했다.
베리만은 1936년 11월 한국을 떠났다. 함경북도 청진항 근해에서 정어리잡이에 나서는가 하면 황해도 사리원에서 봉산탈춤의 매력에 흠뻑 빠지기도 했다. 한국인의 혼례와 장례 등 생활상도 사진과 동영상 등으로 꼼꼼히 기록했다.
그가 21개월 동안 잡은 짐승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본국에 보낸 조류만 해도 380종이었다고 하니 전체 규모를 짐작할 만하다. 표범·곰·스라소니·멧돼지·영양·날다람쥐 등 포유류를 비롯해 난쟁이부엉이·후투티·왜가리·딱새·멧새 등 조류, 파충류, 어류, 갑각류, 조개류 등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박제와 표본 등 모든 동물 수집품을 스웨덴 자연사박물관에 기증했으며, 1938년 4월 ‘한국의 야생동물지(In Korean Wilds & Villages)’를 펴냈다.
그가 남긴 사진과 글, 동물 표본 등은 당시 한국을 널리 알리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지금도 당시 생활사와 동물 생태 연구에 소중한 자료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희귀종 남획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와 생물자원의 손실은 뼈아픈 일이고 지탄받아 마땅하다.
베리만은 책에서 한국인에 대한 호감을 간간이 내비치고 있고 후손들도 그가 한국에 애정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 지배에 관해서는 제국주의 시대 서양인의 전형적인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은 자기 나라의 유구한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갖고 있고, 이에 집착한다. (중략) 한국 사람들은 일본의 통치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모든 일이 잘되어 가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일본이 한국의 번영을 위해 대단한 일들을 성취했고 더 큰 가능성을 창조해냈음을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다. 만약 일본이 한국을 병합하지 않았다면 이 나라는 혼란한 상태가 되어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러시아나 중국이 합병했을 것이다. 개화된 한국 사람들은, 비록 여러 면에서 조선이 너무 멀리 사라졌다고 느낄지 모르겠으나, 일본과의 합병은 한국의 복지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