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도너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부인은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다. 전설상 가야의 첫 왕비 허황옥이 인도 아유타국 출신이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부인도 일본 황족 이방자 여사이니 우리나라 퍼스트레이디의 다문화 전통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닌 듯하다.

프란체스카는 1900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유대인 사업가 루돌프 도너의 세 딸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던 아버지는 영리한 막내가 가업을 잇기를 원해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보냈다. 영어 통역사와 타자·속기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20살 때인 1920년 독일의 자동차경주 선수 헬무트 뵈룅과 결혼했으나 3년 만에 이혼했다.

여행 중이던 프란체스카는 1933년 2월 스위스 제네바의 한 식당에서 이승만을 만났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대사 자격으로 국제연맹총회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고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한국의 입장을 알리러 온 것이었다.

프란체스카는 영어가 유창한 동양의 중년 망명객과 사랑에 빠졌다.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듬해 10월 미국 뉴욕 몽클레어호텔에서 25년 연상의 이승만과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이승만은 모국에 부인이 있었다. 1891년 박승선과 결혼했으나 종교 문제로 부부 갈등을 겪다가 아내가 첫아들을 사산하고 둘째 봉수(태산)마저 8세 때 전염병으로 숨지자 사이가 멀어졌다. 1912년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사실상 결별했다.

프란체스카는 세련된 매너와 국제 감각, 뛰어난 외국어 구사 능력과 타자 실력 등으로 남편의 저술, 강연, 네트워크 형성 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미국과 일본의 충돌을 예견한 이승만의 명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는 프란체스카의 손끝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45년 10월 이승만과 함께 한국에 들어와 돈암장과 이화장에서 살다가 1948년 8월 대통령 취임과 함께 경무대(청와대 전신)로 이사했다. 이듬해 이승만은 호적상 배우자로 남아 있던 박승선을 말소하고 프란체스카와 혼인 신고를 했다. 박승선은 1950년 한국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사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인들은 프란체스카를 한때 호주댁이라고 불렀다. 그녀의 모국을 오스트리아와 발음이 비슷한 오스트레일리아로 착각한 것이다. 이승만은 이름의 앞 글자(Fran)를 따서 이부란(李富蘭)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고 이금순이라는 이름도 썼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 안주인이 된 뒤에도 한복을 즐겨 입고 남편에게 깍듯한 태도와 검소한 생활 습관을 버리지 않아 국민의 호감을 샀다. 그러나 내조에만 그치지 않고 정치에도 개입해 구설에 자주 올랐다. 대통령을 찾는 방문객을 선별해 통제하는가 하면 내각 인사에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초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이 이승만과 불륜 관계라는 소문이 돌자 해임하도록 압력을 넣었다고 한다. 이기붕이 이승만 후계자로 부상한 것도 그의 부인 박마리아가 프란체스카의 시중을 잘 들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미국 하와이로 함께 떠났다. 1965년 7월 19일 이승만이 서거한 뒤에도 하와이에 거주하다가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친정 자매들의 집을 전전했다. 1970년 5월 16일 정부의 배려로 환국해 양자 이인수 교수 부부와 이화장에서 지내다가 1992년 3월 19일 별세해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남편 옆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