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실 쿠퍼 신부
서울시청 서쪽의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성공회 서울대성당) 부속건물에는 한국인 1세대 건축가 김중업이 설계한 세실극장이 있다. 1976년 개관해 1980년대 소극장 중심 연극 문화를 주도했던 곳으로 지금은 국립정동극장이 운영하고 있다. 지하에는 세실레스토랑도 있었다. 재야인사들의 시국선언이나 시민사회단체의 기자회견이 단골로 열리던 장소였으나 다른 이름의 한식당으로 바뀌었다.
극장과 레스토랑의 이름은 성공회 4대 한국교구장 앨프리드 세실 쿠퍼 주교의 이름을 딴 것이다. 얼마나 큰 업적을 남겼기에 135년간 서울대성당을 거쳐간 숱한 사제 가운데 그를 내세웠을까.
16세기 종교개혁 과정에서 영국 국교회로 출발한 성공회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건 1890년이다. 영국 켄터베리대주교로부터 한국교구장에 임명된 군종사제 찰스 존 코프 주교는 마크 트롤로프 신부, 엘리바 랜디스 의료선교사 등과 함께 9월 29일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다. 이듬해 인천 내동에 첫 성당을 짓고 병원도 세웠다.
2대 교구장 아서 베레스퍼드 터너에 이어 3대 교구장 트롤로프는 1931년 세계 성공회 주교들의 모임인 영국 람베스회의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도중 일본 고베항 인근에서 배가 충돌해 숨졌다. 그러자 켄터베리대주교는 24년째 한국에서 활동하던 세실 신부를 주교로 승품해 4대 교구장으로 임명했다. 대한성공회 소속 사제 중에서 교구장이 나온 것은 그가 처음이었다.
1882년 법관의 아들로 태어난 세실 주교는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한 뒤 1907년 사제품을 받고 1908년부터 한국에서 선교와 사목 활동을 펼쳤다. 그는 교구장 취임 2년 만에 신도 2천500여 명을 늘려 전체 신도는 7천여 명으로 불어났다. 10년간 전국에 51곳의 성당을 세웠는데, 전임 주교들이 50년간 설립한 성당 수 64개에 맞먹는다.
그러나 성공회의 교세 확산은 일제가 대륙 침략을 감행하면서 제동이 걸렸다. 1939년 켄터베리대주교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비판하자 일제는 서울 상공에 반영 시위를 촉구하는 전단을 살포했다. 1940년에는 대한성공회도 노골적인 탄압을 받았다.
아서 어니스트 차드웰 보좌주교가 투옥됐고, 에드워드 이언 캐럴 신부도 구류형을 받았다. 세실 주교도 외환관리법 위반 혐의와 단파 라디오 소지죄로 구류형을 받았다. 결국 세실 주교는 1941년 1월 21일 추방당하고 일본인인 구도 요시오 신부가 교구장서리를 맡았다.
세실 주교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4월 19일 돌아와 교구장에 복귀했다. 퇴락한 성당을 재건하고 흩어진 신도를 다시 모으던 중 6·25전쟁이 터졌다. 그는 용인성당과 수원성당을 순방하고 서울대성당으로 돌아와 교단을 지키다가 1950년 7월 18일 인민군들에게 납북됐다.
함께 끌려간 헌트 총감사제와 에마 휘티, 마리아 클라라 수녀는 평안북도(현 자강도) 중강진에서 순교했다. 세실 주교는 북한의 여러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1953년 4월 8일 포로 송환 결정에 따라 영국으로 보내졌다.
세실 주교는 그해 11월 부산을 통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포로 시절 건강이 악화해 교구장 역할을 수행하기 어려웠다. 1년 만에 켄터베리대주교에게 사임을 청원해 12월 31일 받아들여졌다. 영국으로 돌아간 뒤 82세의 나이로 1964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