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중국산 배터리라고 무시하더니"…ESS 겨냥해 '프리미엄' 버리고 LFP 맹추격

한때 '중국산 저가 배터리'로 치부되던 LFP(리튬인산철) 배터리가 글로벌 배터리 산업의 판을 다시 짜고 있다. 낮은 에너지 밀도로 인해 한계를 지적받던 LFP 배터리는 안전성과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대중형 전기차와 ESS(에너지저장장치) 시장의 핵심 배터리로 자리 잡았다.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정체)'이라는 불확실성 속에서 LFP는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전략적 선택지가 된 것이다.

국내 배터리 3사(LG에너지솔루션·SK온·삼성SDI) 역시 삼원계 배터리 중심의 프리미엄 전략에 더해 LFP 라인 확보에 속도를 내며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특히 성장세가 가파른 ESS 시장을 겨냥해 기존 생산라인 일부를 LFP 전용으로 전환하는 움직임이 잇따르고 있다. 그동안 중국 업체들이 주도해온 LFP 시장에서 국내 배터리 3사가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

ESS 성장 국면에서 다시 주목받는 LFP

LFP 배터리가 업계에서 존재감을 키운 배경에는 ESS 시장의 빠른 성장세가 자리하고 있다. ESS는 잉여 전력을 저장했다가 수요가 집중되는 시간대에 다시 공급해 전력망 안정성을 높이는 시스템을 말한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 발전 과정에서 필수 인프라로 부상했다. 최근에는 AI 데이터센터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뒷받침하는 핵심 설비로도 활용 범위가 넓어졌다.

지역별로는 북미가 ESS 시장에서 가장 빠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어 배터리 업계의 새로운 공략지가 됐다. 미국 태양광산업협회에 따르면, 미국 내 ESS 설치 규모는 지난해 연간 36.3GWh(기가와트시)에서 2030년 100GWh 이상으로 3배 가까이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1GWh는 1000억원을 넘어서는 대형 프로젝트 규모다.

이 같은 ESS 시장의 확대 속에서 LFP는 가장 선호도 높은 ESS 배터리 타입으로 꼽힌다. ESS 배터리는 장시간 대용량으로 운용되는 특성상, 폭발 위험이 낮고 높은 열 안정성이 요구된다. LFP는 구조적으로 발열과 열폭주 위험이 적어 이러한 조건에 부합한다. 또한 수명이 길고 원가 부담이 상대적으로 낮아 경제성과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는 것도 강점으로 꼽힌다.

글로벌 리서치 기관 블룸버그NEF에 따르면, 2020년까지만 해도 전 세계 ESS 시장에서는 NMC(니켈·망간·코발트) 배터리 비중이 LFP를 웃돌았다. 그러나 2021년 이후 판도가 뒤집히며 현재는 LFP가 ESS 배터리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ESS 시장을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위해서는 LFP 생산 확대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ESS 시장 확대와 함께 국내 배터리 업계에 유리한 경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는 점도 LFP를 다시 보게 만든 요인이다. 그동안 LFP 시장은 중국 업체들이 주도해 왔다. 하지만 최근 미국을 중심으로 '탈(脫)중국' 기조가 강화되면서 공급망 재편이 진행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배터리 기업들 입장에서는 LFP를 앞세워 ESS 시장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미국은 올해 7월 의회에서 통과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OBBBA)에 따라 내년부터 금지외국기관(PFE) 규제와 최대 50%에 달하는 고율 관세를 시행하며 중국산 배터리와 부품을 단계적으로 배제할 계획이다. 현재 미국 내 ESS 설치 물량의 약 87%가 중국계 LFP 배터리를 사용하고 있는 만큼, 규제가 본격화하면 한국 배터리 기업들이 이 공백을 메울 유력한 대체 공급처로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ESS 시장을 둘러싼 환경 변화에 맞춰 국내 배터리 업체들의 LFP 생산 전략도 속도를 내는 모습이다. 신규 공장 증설보다는 기존 생산라인 전환과 재배치를 통해 투자 부담은 최소화하면서, 빠르게 커지는 ESS 수요에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전략이 주류를 이룬다.

LG에너지솔루션은 지난 2월 미국 미시간주 홀랜드 공장을 LFP 배터리 생산 기반을 갖춘 ESS 전용 기지로 전환했다. 최근에는 미국 완성차 업체 스텔란티스와 합작한 캐나다 윈저 공장 내 일부 자동차 배터리 생산라인을 ESS용 LFP 배터리 라인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양산에 돌입했다. 이를 포함해 LG에너지솔루션의 ESS 배터리 생산능력은 내년 말까지 30GWh 이상으로 확대될 전망이다.

초기 양산·원가 경쟁력 확보가 핵심 변수

LG에너지솔루션은 파우치형 LFP 중심의 포트폴리오에서 나아가 각형 LFP 배터리까지 개발 범위를 넓히고 있다. 각형 배터리는 내구성과 안전성이 강점으로 꼽히는 만큼 ESS 시장 대응에 유리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회사는 지난 3분기 콘퍼런스콜에서 "LFP 각형 양산 기술은 범용화된 기술로 현재 개발 중"이라며 "적층 기술과 하이로딩(High loading) 전극을 통해 에너지 밀도 향상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SDI도 미국 ESS 시장 공략을 위해 LFP 배터리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최근 미국의 대형 에너지 인프라 기업과 ESS용 LFP 배터리 공급을 위한 다년 계약을 체결하면서, 현지 공장 일부 생산라인을 LFP 전용으로 전환해 2027년부터 약 3년간 공급할 계획이다. 업계에선 이번 계약을 계기로 삼성SDI의 ESS 배터리 포트폴리오가 삼원계 중심에서 LFP로 확장될 것으로 보고 있다.

SK온은 내년에 미국 조지아주 단독 공장에서 ESS용 LFP 배터리 생산에 나설 계획이며, 테네시 공장 역시 일부 생산라인의 ESS 전환을 검토 중이다. 국내에서는 충남 서산공장 일부 라인을 ESS용 LFP 배터리 생산으로 전환해 수요 확대에 대응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배터리 3사의 수주와 양산 성과가 실제 실적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린다. ESS 시장이 빠르게 커지는 만큼 초기 양산 안정화와 원가 경쟁력 확보 여부가 향후 성과를 가르는 핵심 변수로 꼽힌다. 일각에서는 과거 공격적인 증설로 실적 부담을 겪었던 경험을 감안할 때, 무리한 확장보다는 시장 상황에 맞춘 유연하고 전략적인 투자 판단이 요구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배터리 업계 관계자는 "AI 산업의 성장으로 데이터센터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배터리 셀 업체 매출에서 ESS가 차지하는 비중도 빠르게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전기차 배터리가 여전히 핵심 사업이긴 하지만, ESS가 새로운 성장축으로 부상하면서 업계의 반등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 시사저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