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 손민수는 서양음악의 거대한 기둥인 J.S.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하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20세 남짓한 나이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니까 어언 30여년 이 곡을 연주한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는 곡은 같아도 매번 다른 연주를 한다.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다뤄온 곡을 다시 무대에 올리면서 “습관을 잊는 것이 지금 가장 큰 도전이다”라고 말한다.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의 이 말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는 예술가의 이 고민이 오늘날 우리 과학기술계가 직면한 절박한 과제와도 맞닿아 있어서이다. 익숙한 습관은 편안함을 주지만, 동시에 새로운 가능성을 가로막는 가장 단단한 벽이 되기도 한다. 작고한 구본형씨가 쓴 책도 있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한국은 지난 수십 년간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로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이미 마련된 길을 재빨리 따라잡아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제조업, ICT, 바이오 등 거의 모든 산업에서 성공의 비결이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글로벌 경쟁은 더 치열해졌고, 기술 패권은 몇몇 선도국의 손에 집중되고 있다. 단순한 추격만으로는 더 이상 생존조차 담보할 수 없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즉 새로운 길을 스스로 열어가는 선택이다.

퍼스트 무버가 된다는 것은 곧 익숙한 길, 즉 기존의 습관을 과감히 잊어야 한다는 의미다. 연구개발 과제의 평가 방식, 정부의 과제 지원 절차, 학계와 산업계의 협력 구조 등은 이미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 있다.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변화를 가로막는 관성으로 작용한다. “늘 해오던 방식”이라는 말이 안도감을 줄 수는 있지만, 그 순간 우리는 더 이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기술혁신의 길은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아니라, 아직 검증되지 않은 낯선 실험 속에서 만들어진다.

특히 과학기술계는 이 도전에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논문 실적이나 특허의 숫자등, 단기적 성과 지표에 갇혀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려면 ‘타성에 젖은 습관’을 버려야 한다. 연구자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가 되어야 하고, 정책은 모험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제도가 필요해보인다. 기술사업화의 전략 또한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결과물을 시장에 내놓는 데 그치지 않고, 완전히 새로운 시장과 수요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더해진 실행이 필요해보인다.

과거에 패스트 팔로어 전략이 통했던 이유는 글로벌 질서 속에서 후발주자가 모방과 개선을 통해 단기간에 추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인공지능, 양자기술, 우주산업, 기후대응기술과 같은 첨단 분야에서는 선점자가 곧 규칙을 정하고 생태계를 주도한다. 우리가 늦게 뛰어들면 단순한 추격조차도 불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습관을 잊는 용기, 즉 기존의 방식에 대한 안락한 집착을 끊어내는 것이 절실하다.

이 과정은 쉽지 않다. 습관을 잊는다는 것은 단순히 연구 방향을 조금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스템 전체를 다시 설계하는 일이다. 대학의 교육과정, 연구소의 평가 지표, 정부의 예산 배분, 기업의 투자 관점까지 모두 바뀌어야 한다. 변화는 결국 사람의 문제이기도 하다. 연구자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도전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고, 정책 입안자는 불확실성을 감내할 수 있어야 한다. 기업은 단기 이익보다 장기 생태계 조성을 우선하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습관을 잊는 일은 곧 자신을 부정하는 고통과 같다. 그러나 그 고통을 회피하는 순간 우리는 과거의 틀에 갇히게 된다. 변화는 늘 불확실성을 동반하지만, 그 불확실성을 돌파하지 못하면 우리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반드시 만들어내야 한다는 절박한 의식이다. 이러한 절박함이야 말로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습관을 잊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 우리 사회와 과학기술계 전체가 직면한 시대적 명령이다. 이제 우리는 과거의 성공을 지탱해온 습관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창조적 모험에 나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퍼스트 무버가 가야할 길이며, 미래를 책임지는 유일한 선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