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얼 쇼와 윌리엄 해밀턴 父子


서울 은평구 녹번동의 은평평화공원에는 군복 차림의 서양인 동상이 서 있다. 미 해군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다. 좌대에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는 요한복음 15장 13절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대전시 서구 도안동 목원대 교정의 교회 앞에는 그의 흉상도 있다. 좌대에는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준 분, 한국인보다 더 대한민국을 사랑한 분, 피 값으로 목원대학교 채플을 세운 분, 여기 그의 숭고한 희생으로 세워진 채플 언덕에 고인의 흉상을 건립하여 그의 한국 사랑, 목원 사랑을 후대에게 널리 기리고자 합니다”라고 적어놓았다. 쇼 대위의 흉상은 경남 창원의 해군사관학교에도 설치돼 있다.

이곳에 그의 동상과 흉상이 들어선 사연은 윌리엄 해밀턴 쇼의 아버지 윌리엄 얼 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0년 8월 22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그는 오하이오 웨슬리언대를 졸업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에 의무병으로 입대했다가 군목으로 전역했다.

1921년 아내와 딸을 데리고 한국 땅을 밟았다. 평안남도 평양의 광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일하며 서위렴(徐煒廉)이란 한국식 이름도 얻었다. 1926년 안식년을 얻어 귀국한 뒤 보스턴신학대학원을 졸업했다. 1년 뒤 다시 돌아와 평안북도 영변, 황해도 해주, 중국 만주 등지에서 사역하다가 1941년 일제에 의해 추방됐다.

웨슬리언대 신학부장을 거쳐 필리핀에서 선교하다가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6·25가 발발하자 주한미군에 자원입대해 군목으로 복무했다.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해 육군에 군종 제도를 도입하도록 하는가 하면 감리교 대전신학원(목원대 전신) 창립 이사로 참여하고 강단에 서기도 했다.

부인 아델린도 해방 전 평양의 숭덕여학교에서 교육선교사로 활동했고, 1955년 대전에 정착촌 성화장을 지어 전쟁 미망인들을 돌봤다. 쇼 부부는 1961년 은퇴해 귀국했다가 1966년과 1971년 각각 세상을 떠나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혔다.

이들 부부의 아들인 서위렴 2세, 즉 윌리엄 해밀턴 쇼는 1922년 6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외국인학교와 미국 웨슬리언대를 다녔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해군 소위로 입대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했다가 1946년 9월 해군 중위로 전역했다. 1947년 한국으로 돌아와 미군정청에 근무하던 중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조선해양경비대 사관학교가 창설되자 교관으로 부임해 항해술과 함정운용술을 가르쳤다.

1950년 2월 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주 이스트브렌트리교회에서 목회 활동을 펼치는 동시에 하버드대 대학원 철학박사 과정을 밟기 시작했다. 공부를 마치고 아버지 뒤를 이어 선교사로 한국에서 봉사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넉 달 뒤 라디오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평양에서 태어나 17살 때까지 자란 그에게 한국은 모국이나 다름없었다. 고심 끝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띄우고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둔 채 군에 재입대했다.

“지금 한국인들은 전쟁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고 피 흘리고 있는데, 제가 흔쾌히 도우러 가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한국인을 위해 희생해 평화가 이뤄진 다음 선교사로 달려가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어와 한국 지리에 능통한 그는 더글라스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을 맡아 인천상륙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서울 수복 전투에도 자원해 미군 제1해병사단 5연대에 배속됐다. 그러나 9월 22일 녹번리 전투에서 북한 인민군과 교전하다가 28세의 나이로 전사해 부모보다 먼저 양화진에 묻혔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각각 금성 을지무공훈장과 은성훈장을 수여했다. 2023년 국가보훈처와 한미연합사령부는 쇼 부자를 맥아더 사령관, 밴플리트 장군, 김영옥 대령, 백선엽 장군 등과 함께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을 기리고자 5,955명으로부터 1만4,500달러를 모금해 1957년 목원대에 해밀턴기념예배당을 세웠다.

남편을 잃은 부인 후아니타는 1956년 두 아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건너왔다. 이화여대 교수로 재직하며 세브란스병원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서울대 법대 초빙교수를 지낸 맏아들 로빈슨과 작가인 며느리 캐롤은 한국학에 관한 저서들을 남겼고 장학사업과 한미 학술교류 등에도 힘썼다. 로빈슨과 캐롤 부부의 딸 줄리는 1990년부터 4년간 주한미군 장교로 오산 공군기지에서 근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