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여성 독립유공자 9명 가운데 3명은 한국인과 결혼해 남편과 함께 항일투쟁을 펼쳤다. 김성숙의 아내 두쥔후이(杜君慧)가 2016년 가장 먼저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조성환의 부인 리수전(李淑珍)과 박열 부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에게는 각각 2017년 애족장과 2018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두쥔후이와 리수전은 중국 국적이고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인이다.
두쥔후이는 1904년 중국 광둥성 광저우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책을 즐겨 읽고 역사책에 등장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녀의 혁명 정신과 자유분방한 성격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다.
혁명가들이 청나라 군인들에게 붙잡혀가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어린 두쥔후이에게 “모두 훌륭한 분들이란다. 피 흘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짜 사나이거든”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수립되자 남편과 시동생의 변발(앞머리는 빡빡 밀고 뒷머리는 길게 땋는 만주족 헤어스타일)을 직접 잘라주었다.
1924년 쑨원이 설립한 광둥대(쑨원 사망 이듬해인 1926년 쑨원의 호를 따서 중산대로 개명)가 여학생 입학을 허가하자 두쥔후이는 시험에 응시해 합격했다. 광둥성 최초의 여대생이었다. 이곳에서 그녀는 김성숙에게서 일본어 과외를 받으며 가까워졌다.
김성숙은 1898년 평안북도 철산군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성암이고 성숙은 승려가 되면서 얻은 법명이다. 1916년 봄 만주 신흥학교에 들어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일본군의 경비가 삼엄해 국경을 넘는 데 실패한 뒤 함경남도 원산 서강사로 출가했다. 경기도 양평 용문사에서 사미계를 받고 남양주 봉선사에서 월초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김성숙은 월초 스님과 가깝던 손병희·한용운·김법린 등과 교류하며 민족정신과 독립사상을 배웠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기도 양주와 포천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7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불교 개혁운동과 사회주의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3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대와 민국대를 다니며 한국인 최초의 공산주의 잡지 ‘혁명’, 베이징불교유학생회 기관지 ‘황야’, 고려유학생회 기관지 ‘해외순보’ 등의 발간을 주도하고 의열단에도 가입했다. 1925년 광저우로 활동 무대를 옮긴 뒤 이듬해 중산대에 입학해 김원봉·김산 등과 유월한국혁명동지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혁명운동’ 주필을 맡았다.
두쥔후이를 만났을 때 김성숙은 한국에 부인과 1남1녀를 둔 상태였으나 사랑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동료들은 “부르주아 아가씨와 연애병에 빠졌다”고 놀리며 그가 공산주의 활동에 전념하기를 바랐다. 김산의 제안에 따라 두쥔후이는 1928년 초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으나 3개월 만에 돌아오고 말았다.
두쥔후이는 그해 6월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혁명 이론을 전파하고 국민당 정부의 부패를 폭로했다. 둘은 ‘사회과학사전’과 ‘교육사’를 함께 번역하기도 했다. 1929년 상하이에서 결혼한 뒤 상하이여성구국회에 가입해 여성 항일운동을 이끌었다.
김성숙은 1938년 김원봉 등과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가 1940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1943년 외교위원에 선임되자 두쥔후이도 외무부 직원으로 발탁돼 외사과와 정보과 등에서 근무하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1945년 7월에는 미국에서 발행되는 신문 ‘독립’에 ‘해외 조선 부녀 동포들에게-혁명자 후원사업을 하자’란 제목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해방 후 1945년 12월 1일 김성숙은 두쥔후이와 아들 셋을 남겨둔 채 미군 수송기를 타고 환국했다. 해방 정국에서는 여운형·김규식과 좌우 합작운동을 벌였고, 이승만 정권 시절 반독재 투쟁을 펼치다가 두 차례 수감됐다. 4·19혁명 후 사회대중당에 참가해 정치활동을 재개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투옥됐다. 1969년 4월 12일 7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경기도 파주에 묻혔다가 2004년 국립서울현충원 임정 묘역으로 이정됐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혼자 남은 두쥔후이는 세 아들과 고향으로 돌아갔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배를 타고 인천에 도착했지만 이승만 정권은 부자 상봉을 끝내 가로막고 월미도 수용소에 감금했다가 추방했다. 두쥔후이는 베이핑여2중학교와 베이징제6중학교 교장 등을 지낸 뒤 1981년 사망했다.
중국의 세 아들은 어머니 성을 따라 이름을 호적에 올렸다. 첫째가 광둥성 교향악단 지휘자로 이름을 날린 두간(杜甘)이다. 그의 아들은 줄리아드음악원 출신의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두닝우(杜寧武)로 여러 차례 방한했다. 둘째 두젠(杜健)은 화가이자 베이징중앙미술대 교수이고, 셋째 두롄(杜連)은 국가발전개혁위원회 고문을 맡고 있다.
외손자 민성진 씨가 회장을 맡은 운암김성숙선생기념사업회는 둘의 사랑이 싹튼 중산대에 김성숙·두쥔후이 기념관을 짓기로 하고 2007년 중산대와 양해각서를 체결한 데 이어 2018년 기념관건립추진위원회 구성에 합의했으나 아직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