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기준(ISO·EU)과 한국 포장정책의 정합성
2024년 EU는 ‘포장 및 포장폐기물규제(PPWR)’를 의결했다. 이 규제는 2030년까지 모든 포장재를 재활용 가능 구조로 전환하고, 2040년에는 완전한 순환형 소재로 전면 대체를 목표로 한다. ISO 18602(포장환경요건) 역시 같은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한국의 관련 제도는 여전히 ‘표시’ 중심에 머물러 있다. 이는 국제 무역에서 ‘비관세 장벽’으로 작용할 수 있다.
수출 중심의 한국 포장산업은 규제 선진국의 요구에 맞춰야만 시장 접근이 가능하다. 따라서 정책은 ‘국가 기준’이 아닌 ‘국제 기준’을 향해야 한다. 법적 정합성 확보는 기술경쟁력의 출발점이며, 포장정책은 이제 환경정책이 아니라 무역정책의 영역이다.
기후법·탄소세·그린워싱 규제의 산업적 파급효과
기후위기 대응 입법이 산업 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세 가지 축으로 요약된다: ▲탄소세(가격정책), ▲그린워싱 규제(신뢰정책), ▲탄소중립인증(보상정책). 포장산업은 이 셋 모두의 교차점에 있다. 탄소세는 제조단계의 직접비용을 상승시키고, 그린워싱 규제는 기업의 마케팅 표현까지 법적 통제를 강화한다. 반면, 탄소감축 인증을 통한 인센티브는 기업의 전환을 촉진한다. 즉, 규제와 보상이 동시에 작동하는 시대이다.
특히 2025년 시행 예정인 EU의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는 포장소재 수출기업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국내 정책은 기업의 감축능력만큼 데이터 신뢰성을 높여야 한다. “정책 리스크는 정보 비대칭에서 온다”는 점에서, 산업의 정보공유 플랫폼이 핵심 인프라가 될 것이다.
‘탄소라벨’과 소비자 선택의 법적 신뢰성
제품 라벨에 표시된 ‘친환경’, ‘탄소저감’이라는 문구는 소비자의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린워싱 사건이 늘어나면서 표시·광고법 위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실제로 환경부 조사(2024)에 따르면 ‘탄소감축’ 문구를 사용하는 포장제품의 70% 이상이 객관적 검증이 불가능했다. 따라서 ‘탄소라벨제’는 단순 홍보가 아니라 법적 신뢰체계다.
영국의 Carbon Trust, 일본의 EcoLeaf는 엄격한 LCA 기반 인증을 실시한다. 한국도 2026년부터 ‘탄소발자국 검증기관’ 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나, 포장산업 특성상 다층 구조(Layered Material)의 분석 난이도가 높다. 기술·데이터 기반의 정량화 체계 없이는 신뢰를 얻을 수 없다. 소비자의 선택은 신뢰에서, 신뢰는 검증에서 시작된다.
포장산업의 탄소감축 혁신사례: 기술·정책 융합모델
탄소감축의 현실적 돌파구는 기술혁신과 정책의 융합이다. 예를 들어 일본의 닛폰포장(Nippon Packaging)은 플라스틱 라미네이트 대신 종이+바이오수지 복합소재를 도입하여 탄소배출을 48% 줄였고, 정부의 탄소세 감면 혜택을 받았다.
국내에서도 스프링 없는 펌프캡, 단일소재 파우치 등과 같은 구조감량형 기술이 등장하며 산업 전환의 신호를 보여준다.
이 사례들은 ‘기술이 곧 감축’이 아니라, ‘정책과 기술의 동반진화’가 가능함을 증명한다. 즉, 정부는 표준화(단체표준·국가표준)를 통해 산업 혁신의 방향을 제시하고, 기업은 그 프레임 안에서 기술경쟁력을 창출해야 한다. 포장산업의 진정한 혁신은 탄소가 아닌 ‘데이터’를 감축하는 데서 시작된다.
기후위기 시대의 포장산업 거버넌스 구축방안
거버넌스란 정부·산업·시민사회가 역할을 분담하며 공동목표를 추구하는 구조다. 기후위기 대응에서 포장산업은 세 주체의 이해가 가장 복잡하게 얽힌 영역이다. 따라서 거버넌스는 다음의 3단계로 설계되어야 한다. 이 셋이 연결될 때, 정책은 지속가능성을 갖는다.
① 법적 인프라(기후법, 자원순환법)
② 기술적 인프라(LCA, 감축DB)
③ 사회적 인프라(소비자 참여 및 인식).
포장산업은 거버넌스 구축의 ‘시험대’다. 국가가 아닌 ‘시장’이 규제의 집행자가 되는 구조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ESG는 정부가 부여한 의무가 아니라 시장이 요구하는 언어이며, 포장기업은 이 언어를 산업 전략으로 번역할 필요가 있다.
‘포장정책 대전환’을 위한 입법 및 산업정책 제언
한국의 포장정책은 지금 ‘선언에서 실행’으로의 대전환기에 있다.
첫째, 포장 관련 법체계를 「자원순환기본법」 중심에서 「기후대응산업법(가칭)」으로 확장해야 한다.
둘째, 산업정책의 패러다임을 ‘제품 기준’에서 ‘시스템 기준’으로 이동시켜야 한다.
셋째, 중소·중견 포장기업이 감축 데이터와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포장탄소관리 플랫폼’을 구축해야 한다.
결국 기후위기 시대의 산업정책은 규제가 아니라 ‘설계의 혁신’이다. 포장은 단순한 보호재가 아니라, 인류의 소비구조를 반영하는 산업적 거울이다. 지속가능한 포장정책이란, 바로 그 거울을 통해 산업과 사회의 진화를 성찰하게 하는 시스템이다. 따라서 입법의 목표는 단순한 감축이 아니라 ‘전환을 설계하는 능력’에 있다. 이제 한국 포장산업이 그 전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