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그대의 운명이 지금 눈앞에 다가왔다. 그대가 일찍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묻히려 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나는 생각할 바를 모르고 있다. 잔인한 끌이나 무정한 망치가 그대의 몸을 조금씩 조금씩 파괴할 날도 이제 멀지 않다.”
일제가 경복궁 근정전 바로 앞에 조선총독부 새 청사를 짓기 위해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을 철거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의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1922년 일본 잡지 ‘개조’ 9월호에 실은 글의 한 대목이다. 국내 일간지 동아일보에도 ‘장차 잃게 된 조선의 한 건축 광화문을 위하여’란 제목으로 게재돼 거센 철거 반대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일제는 1927년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입구로 옮겼다.
야나기는 1889년 3월 21일 해군 소장 야나기 나라요시의 3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병부성 해군부 수로국 초대국장과 귀족원 의원 등을 역임했고, 외조부도 해군대장과 해군장관을 지냈다. 친가와 외가 모두 군인 명문가였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읜 뒤 황족과 귀족 자제들이 다니는 가쿠슈인 초중고를 거쳐 도쿄제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 시절이던 1910년 문예지 ‘시라카바(白樺)’를 창간했는데, 동인들과 함께 70회 생일을 맞은 프랑스 조각가 로뎅의 특집호를 제작하며 로댕에게 일본 전통 판화 우키요에를 선물했다가 답례로 조각 작품 3점을 받았다. 서울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로뎅 작품을 보려고 1914년 야나기 집을 방문하며 선물로 조선의 ‘청화백자추초문각호’를 들고 왔다.
야나기는 이 항아리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공부한 뒤 1916년 한국을 찾아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안내로 합천 해인사와 경주 석굴암 등을 답사했다. 서울로 올라와 동생 아사카와 다쿠미도 만나 이들 형제가 수집한 조선 도자기 등 공예품을 감상했다.
야나기는 조선 미술품을 통해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고 조선인을 사랑하게 됐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3월 20~24일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조선인을 생각한다’란 제목으로 임진왜란과 왜구의 침략을 날카롭게 비판했다. 이 글도 동아일보에 실려 많은 한국인 친구를 얻었다.
“역사가들은 흔히 ‘조선 정벌’을 한 나라의 용감한 기록처럼 말하나 그것은 오직 고대의 무사가 그들의 정복욕을 충족하기 위해 아무런 뜻도 없이 저지른 죄 많은 행동이었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의 고예술, 즉 건축이나 미술품이 거의 파손된 것은 대부분이 실로 놀랍게도 무서운 왜구가 범한 죄였다. 중국은 조선에 종교나 예술을 보냈으나 그것을 거의 파괴한 것은 우리 일본의 무사였다.”
야나기는 1920년 5월에도 경성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성악가 아내의 독창회를 위해서였다. 종로2가 YMCA에서 열린 공연은 대성황을 이뤘고 숙명여학교 등에서도 무대를 꾸몄다. 야나기도 종교와 예술을 주제로 강연을 펼쳤다.
야나기는 아사카와 형제와 의기투합해 도자기, 고미술, 민예품 등을 수집·보존·전시할 조선민족미술관 건립에 나섰다. 조선 사람에게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헐값에 팔려 나가거나 도굴과 약탈 등으로 일본에 반출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야나기 아내도 음악회 수익금을 보태 1924년 4월 9일 경복궁 집경당에 문을 열 수 있었다.
야나기는 1922년 논문 ‘조선의 미술’과 저서 ‘조선과 그 예술’을 발표한 데 이어 1928년 도쿄 국산진흥박람회에서 조선 민예품들을 전시 판매했다. 1936년에는 도쿄에서 이조도자기전람회와 이조미술전람회를 개최하고 일본 민예관을 건립했다. 1946년과 1947년에도 ‘미술과 공예 이야기’와 ‘지금도 계속되는 조선의 공예’를 펴내는 등 우리나라 미술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힘썼다.
그는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민예품의 가치를 깨우쳐주었다. 민화라는 말도 그가 처음 썼다. 야나기가 생각하는 조선 미술의 아름다움은 비애미(悲哀美)와 선(線)의 아름다움으로 요약된다. 참혹했던 조선의 역사가 전자를 낳고, 여운을 남기는 조선인의 심성이 후자를 잉태했다는 것이다.
말년에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하다가 1961년 5월 3일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를 두고 ‘한국 미술의 조형미를 알아본 심미안의 소유자’, ‘한국 민예품의 가치를 널리 알린 전도사’, ‘조선인보다 더 조선을 사랑한 사람’ 등의 칭찬이 쏟아졌다. 한국 정부는 1984년 9월 보관문화훈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의 인식과 미학이 일제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편견이라는 비판이 뒤늦게 제기됐다. “일제가 1910년대 무단통치에서 1920년대 문화통치로 전환하는 과정에 사실상 협조한 셈”이라는 평가와 함께 ‘제국주의 공범’이라거나 ‘식민통치 훈수꾼’이라는 혹평까지 나왔다.
그러나 그에게 일본인들의 보편적 인식에서 벗어나라고 요구하거나 일제 식민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하라는 주문은 무리였을지 모른다. 그는 일본 귀족 출신이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조선 미술을 사랑했고 조선인과 친구가 되고 싶어한 예술인이자 인도주의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