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신 재코타(JaKoTa)’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일본·한국·대만이 엮인 새로운 동아시아 경제 지형을 설명하는 표현이다. 대만은 반도체 파운드리에서 세계의 기준이 되었고, 일본은 소재·장비와 제조 역량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반면 한국은 성장률 둔화, 인구 감소, 산업 전환 지연이라는 삼중의 압박 속에 서 있다. 문제는 단순히 경쟁력이 떨어졌다는 진단이 아니라, 이제 어떻게 성장할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설계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은 오랫동안 패스트 팔로워 전략으로 성공해왔다. 선진국이 만든 규칙을 빠르게 학습하고, 표준을 정확히 따라가며, 정부는 필요한 규칙을 미리 제시했다. 기업은 그 규칙에 맞춰 설비를 투자하고 인력을 배치했다. 빨리 가려면 이미 난 길을 더 효율적으로 달리는 것이 합리적이던 시대였다. 규칙은 가이드였고, 정답은 존재했다.

그러나 신 재코타 시대에는 상황이 다르다. 더 이상 베낄 교과서가 없다. 대만의 길도, 일본의 길도 그대로 따라갈 수 없다. 이 말은 곧 한국이 의도하든 원하든 퍼스트 무버의 위치에 서 있다는 뜻이다. 퍼스트 무버에게는 가이드가 없다. 정답도 없다. 많이 해보고, 자주 실패하고, 그 과정에서 길을 찾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이때 규칙은 사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시행착오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성장률은 규칙을 잘 외운다고 오르지 않는다. 새로운 시장을 시험하고, 새로운 협력 방식을 실험하며, 실패를 감내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숫자가 움직인다. 이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의 문제다. 규제를 풀자는 구호보다 중요한 것은, 실패가 반복될 수 있도록 되돌릴 수 있는 규칙, 다시 시도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일이다.

여기서 하나의 제안을 해보고 싶다. 27~38개국이 참여하는 OECD 같은 거대한 경제권을 한 번에 구현하기보다, 우리가 훨씬 현실적으로 만들 수 있는 작은 경제공동체를 먼저 설계해보자는 것이다. 재코타를 단순한 비교 구도가 아니라 협력 블록으로 전환하는 상상이다. 일본의 소재·장비와 제조 공정, 한국의 메모리·배터리·플랫폼, 대만의 파운드리와 글로벌 고객 네트워크를 하나의 실험장으로 묶는 경제공동체다.

이 공동체의 규칙은 완성형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임시 규칙, 테스트 규칙, 실패를 전제로 한 규칙이어야 한다. 핵심 산업에서의 공동 인증, 인재 이동의 상호 인정, 연구개발 데이터와 시험 규격의 공유, 스타트업과 중견기업이 먼저 매출을 만들 수 있는 공동 테스트베드가 필요하다. 이 모든 것은 한 번에 성공하라는 메시지가 아니라 여러 번 해보라는 신호다.

대표들에게도 분명히 말하고 싶다. 이제는 정부의 완성된 규칙을 기다리면 늦는다. 시장은 먼저 움직이고, 규칙은 그 뒤를 따라온다. 회사의 무대를 처음부터 국내가 아니라 재코타 시장으로 설정하고, 여러 번 시도할 수 있는 구조를 내부에 만들어야 한다. 직원이 회사에 남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패스트 팔로워 시대에는 규칙을 잘 지키는 나라가 성장했다. 퍼스트 무버의 시대에는 규칙을 만들어내는 나라가 성장한다. 신 재코타 시대의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분명하다. 완성된 답을 찾기보다 반복 가능한 실험의 장을 여는 것. 성장률은 그 실험의 횟수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