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설립된 금융결제 회사 ‘페이팔(PayPal)’은 2002년 15억달러로 이베이에 매각됐다. 당시에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다. 매각으로 거액을 손에 쥔 일론 머스크, 피터 틸, 리드 호프먼 등은 페이팔을 나와 스타트업과 투자회사를 만들었고, 다수의 기업들이 페이팔을 넘어서는 대성공을 거뒀다. 페이팔 출신들이 함께 새로운 스타트업을 만들고 육성하여 수많은 스타트업 영웅을 만들어낸 것이다.
언론에서는 이들의 끈끈한 휴먼 네트워크를 마피아에 비유해 ‘페이팔 마피아’로 명명했다. 실리콘밸리를 좌지우지하는 거대한 스타트업 생태계가 탄생한 것이다.
페이팔의 초대 CEO 머스크는 테슬라와 스페이스X를 창업했고, 2대 CEO인 틸은 팰런티어를, 엔지니어였던 스티브 첸과 웹 디자이너 채드 헐리는 유튜브를 창업했다. 호프먼은 링크드인을 창업해, 마이크로소프트에 36조원에 매각한 후 투자회사를 설립했다.
지난 8월 월스트리트저널은 ‘팰런티어(Palantir)’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사관학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기사를 냈다. 팰런티어 출신 창업자들의 성공 사례가 잇따르면서 과거 실리콘밸리를 주름잡았던 페이팔 마피아처럼 이제는 팰런티어 출신의 ‘팰런티어 마피아’가 실리콘밸리의 새로운 권력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팰런티어는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인 피터 틸이 2003년 5월 창업한 데이터 분석 인공지능(AI) 기업이다. 팰런티어는 국방과 정보기관을 주요 고객으로 삼으며 ‘실리콘밸리의 이단아’로 불렸다. 민간으로 영역을 넓히며 빠르게 성장했다.
팰런티어 출신이 창업하거나 CEO를 맡고 있는 기업은 350개가 넘었으며, 그중 12개는 유니콘기업으로 성장했다. 데이터 분석 스타트업 헥스테크놀로지의 배리 매카델, 페레그린테크놀로지의 닉 눈, 그리고 국방 스타트업 중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안두릴인더스트리스의 트레이 스티븐스이 팰런티어 마피아 멤버다.
이들은 팰런티어 출신이 창업했거나 CEO로 있는 기업에 투자하는 ‘팔루미 벤처캐피털(Palumi VC)’이라는 전용 펀드도 만들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또다른 마피아가 급부상하고 있다. ‘오픈AI’를 나와 스타트업을 시작한 소위 ‘오픈AI 마피아’들이 AI 산업을 쥐락펴락하며 오픈AI의 최대 경쟁자로 떠오른 것이다.
이들의 등장으로 오픈AI 중심의 독점적 AI 생태계가 급격한 변화를 보이며 다변화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다리오 아모데이가 세운 ‘앤트로픽’, 아라빈드 스리니바스가 설립한 ‘퍼플렉시티’, 일리야 수츠케버가 창업한 ‘세이프 슈퍼인텔리전스’, 미라 무라티가 만든 ‘싱킹 머신스 랩’ 등이 있다. 오픈AI 출신들이 만든 스타트업은 벌써 30개가 넘는다. 이들이 조달한 자금도 최근 1년에만 12조원이나 됐다.
이 밖에도 실리콘밸리에는 ‘엑스 구글러(Ex-Googler)’, ‘스탠포드 마피아’, ‘페이스북 마피아’라 불리는 스타트업 네트워크가 존재한다. 모두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천사와 같은 역할을 한다. ‘선한 마피아’이며 공식적으로는 ‘비즈니스 엔젤’로 불린다.
이들 마피아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함께 새로운 스타트업을 만들고, 상호 투자도 하고, 또한 유망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육성하며 자금 지원을 한다. 또한 성공한 사업가 및 투자자와 ‘인맥’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직접 멘토가 되어서 기술이나 재무·경영에 관해서도 조언한다.
이러한 선한 마피아 활동은 성공한 ‘앙트러프러너(Entrepreneur)’가 가장 그들답게 사회에 공헌하는 방식이다. 비즈니스 엔젤이 생태계에 많아질수록 선순환 효과가 커진다. 실리콘밸리가 끊임없이 성장하는 이유다.
미국에는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Business Hall of Fame)’이 있다. 1975년 로크웰 인터내셔널 회장 윌라드 로크웰이 모범적인 비즈니스 리더십 사례를 사회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설립을 주도했다. 토마스 에디슨, 앤드루 카네기, 월터 클라이슬러, 마빈 바우어 등 글로벌 비즈니스맨 270명 이상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은 기업경영이 사회적 책임 활동이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개인의 큰 성공은 기본적으로 국가와 사회 전체의 조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개인이 이룩한 유무형의 성과는 사회와 공유할 자산이기도 하다. 공동체가 부여하는 명예란 개인이 이룬 부의 크기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의식에 대한 존경의 의미다.
전통적 비즈니스맨들과 다르게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미 기업가치 수조 원대의 기업을 키워낸 앙트러프러너들이 미국은 물론 한국, 중국 등 많은 나라에서 등장하고 있다. 대중의 관심은 주로 ‘얼마’의 돈을 벌었는가에 집중된다.
그러나 성공한 앙트러프러너는 어느 날 갑자기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남들이 하지 않는 모험을 통해 혁신의 가치를 창출한 사람들이며, 경제적 성공은 그들의 노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의 성공을 개인의 역량보다는 비즈니스 생태계에서 얻은 혜택으로 인식하여, 재산을 기부하고 재능을 나눔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이러한 사회적 부채의식이 성숙한 기부문화를 만든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메타의 마크 저커버그 등 성공한 앙트러프러너가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했거나 약속한 이유다.
현재 한국 경제는 저성장 늪에 빠져 있고, 재도약의 돌파구도 보이지 않는다. 빠른 시간 내에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혁신 생태계의 구축이 시급하다. 혁신 생태계는 사회의 혁신 수용성과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이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의 스타트업 지원 시스템은 한국이 단연코 전 세계 최고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혁신 기업 육성과 스타트업 활성화는 미진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국가가 책임질 수는 없다. 또한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방증이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혁신 생태계를 견인할 ‘K-마피아’가 나와야 한다. 스타트업 강국으로 가기 위한 마중물이 절실하기 때문이다.
*[출처: 조선일보] https://www.chosun.com/economy/economy_general/2025/10/03/B234GECZ2OJ5SJJBWWYN7B5SZE/?utm_source=kakaotalk&utm_medium=shareM&utm_campaign=M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