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라파고스(Jalapagos)”는 일본(Japan)과 갈라파고스(Galápagos)를 합쳐 만든 말이다.
섬처럼 고립된 환경에서만 통하는 독자적 진화를 빗대어, 일본 기업들이 내수 시장에만 안주하며 세계 표준과 단절된 채 쇠락하는 현상을 비판하는 표현이었다. 일본 휴대전화 산업이 대표적 사례였다. 첨단 기능과 독특한 디자인을 자랑했지만, 글로벌 흐름과 맞지 않아 결국 세계 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 단어는 오랫동안 일본 대기업의 한계를 상징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달라졌다.
최근 소니와 Rapidus의 행보는 “잘라파고스”라는 비판을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만들고 있다. 소니는 몰락한 제국의 상징처럼 불렸다. 워크맨과 트리니트론,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세계를 선도했지만, 삼성과 애플 같은 글로벌 경쟁자들에게 밀리며 시장에서 존재감을 잃었다. 그러나 소니는 좌절하지 않았다. 위기 속에서도 연구개발을 멈추지 않았고, 스스로를 재정의했다. 이미지센서, 반도체, 인공지능 같은 미래 기술에 과감히 투자했고,
영화·음악·게임 같은 콘텐츠를 하드웨어와 결합해 종합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 변모했다.
플레이스테이션은 단순한 게임기가 아니라 세계 게이머와 창작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이 되었고, 소니는 다시금 글로벌 무대의 주역으로 돌아왔다. 몰락에서 부활로의 전환은 오직 R&D 덕분이었다.

일본 반도체 산업 역시 오랫동안 쇠락의 길을 걸었다. 1980년대 세계를 주름잡던 힘은 사라지고, 한동안 일본 반도체는 ‘잃어버린 왕국’으로 불렸다. 하지만 지금 Rapidus가
그 부활의 깃발을 들었다. IBM, IMEC 등과 협력하며 2027년 2나노 공정 양산을 목표로 내걸었다. 홋카이도 치토세의 신공장에서 이미 게이트-올-어라운드(GAA) 기반의 회로 시제품을 만들어냈고, 전기적 특성 검증도 성공했다. 2026년에는 고객용 공정개발키트(PDK)를 제공해 실제 설계자들이 시제품을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할 계획이다.
물론 양산 과정의 수율, 원가, 인력 확보 같은 난제가 남아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과거와 다르다. 정부와 민간기업의 합동 투자, 국제 연구기관과의 협력은 고립된 섬나라식 독자 진화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방식이다. ‘잘라파고스’를 벗어나려는 강한 의지가 Rapidus의 노력 속에서 드러난다.

이 흐름은 한국 기업에도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잠재성장률은 이미 0%대라는 진단이 나온다. 내수 한계와 인구 구조 변화, 글로벌 경쟁 격화 속에서 여전히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전략에 머물러 있다면 한국판 잘라파고스(코레파고스)를 맞이할 수 있다. 단기 실적과 비용 절감만으로는 미래를 열 수 없다. 위기의 순간에도 R&D에 투자해야 한다는, 일본 기업들의 경험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다. 세계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사업을 만들어내는 상상력이다. 소니는 콘텐츠와 기술을 융합해 새로운 문화 생태계를 만들었다.
Rapidus는 국제 협력 속에서 첨단 반도체 경쟁에 재도전하고 있다. 우리 기업도 기술을 넘어, 글로벌 시장과 호흡하는 새로운 가치,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혁신을 창출해야 한다.
R&D는 그 출발점이며, 신사업은 그 완성이다.

잘라파고스는 일본의 과거를 설명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혁신을 멈춘다면, 그 단어는 곧 우리의 미래를 설명하게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지금이야말로 과감한 연구개발과 세계와의 협력으로 새로운 전성기를 열 수 있다면, 잘라파고스는 일본의 옛이야기로만 남고, 우리 기업은 다시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