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


중국의 과학 기술 발전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빠르다. 최근 중국은 시속 650㎞를 돌파한 자기부상열차를 선보이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유니트리의 휴머노이드 로봇과 딥씨크 R-1 모델 같은 첨단 기술도 3-4년 만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으며 기술력을 입증했다. 이러한 중국의 급부상은 우리나라 과학 기술 정책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약 20년 전, 중국이 독일 기술을 도입해 자기부상 열차 시험 운전에 나설 즈음, 우리나라는 독일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국산 자기부상열차를 개발하며 기술 강국의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한국의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는 이스라엘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높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과학 기술의 한계를 보이는 데는 여러 구조적인 문제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으로 30년 전 도입된 연구과제중심운영제도(PBS)의 문제다. 연구 성과의 향상을 기대하며 도입됐지만, 연구자들은 과제 수주에 몰두하게 되었고, 빠른 성과를 보여 줄 수 있는 연구와 목표가 모호한 집단 연구가 확대되었다. 장기적이고 도전적인 기초연구와 원천기술 등은 소외되었고 연구의 자율성과 창의성은 배제되었다. 그렇게 우리나라 국가R&D 연구과제의 성공률은 98% 수준이 되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운영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은 매년 60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집행하지만, 인공지능 연구에 필수적인 대규모 컴퓨팅 인프라 구축은 여전히 요원하다. 기관예산의 80% 이상이 PBS 구조인 상황에서 기관 고유의 전략적 투자와 장기적 연구 추진이 어려운 이유다.

그런데도 한국의 연구자들은 열정과 역량으로 세계적 성과를 내고 있다. 반도체, 바이오, 우주항공 등 일부 분야에서는 국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더 이상의 비효율을 극복하고 향후 10년, 20년을 준비하려면 R&D 시스템의 근본적 혁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몇 가지 개선 방안이 요구된다.

첫째, 국가 예산의 5% 수준의 R&D 총액예산을 정하고, 기초·응용·개발 등 분야별 지원 규모를 법제화할 필요가 있다. 부처별 유사한 사업들을 통합하여 수천 개로 세분된 연구사업 수를 축소하고 사업 기획에 드는 행정과 예산을 줄여야 한다. 기초연구는 연구자 중심의 Bottom-Up 방식으로 지원하고, 개발연구는 사업화를 전제로 지원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부처 간 칸막이를 없애고 정부 조직 개편을 통한 부처 간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 부처별 업무 경계는 기술 융합과 진보에 심각한 제약으로 작용해 왔다. 혁신 전담 부처는 R&D에서 사업화까지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셋째, 국가 R&D 성과 평가 체계를 개선해야 한다. 정부는 사업의 기획과 홍보에는 높은 행정력을 쏟지만 기술 관리와 성과에는 매우 인색하고 형식적이다. 부처 자체 평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미국의 감사원(GAO)의 STAA처럼 전문성과 독립성을 갖춘 성과 평가 전문기관 설치가 필요하다.

넷째, 출연연 혁신을 통해 대형 국가 사업을 주도할 수 있도록 조직 구조를 재편하고 국가R&D 수행의 중심축으로의 역할 부여도 필요하다. 이외에도 연구비 집행에 있어 규제를 줄여 유연성을 부여하고, 연구 성과와 과정을 기록하고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

대덕연구단지의 멈춰 선 자기부상열차는 한국 R&D의 현실을 상징한다. 연구자에게는 자율과 책임을 부여하고, 정부는 기술 성과와 활용을 체계화하여 선순환적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변하고 연구자 모두가 변화에 동참한다면, 다시 한번 세계를 선도하는 기술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K-이니셔티브(주도권)는 이러한 기초들이 바로 섰을 때 비로소 가능해지리라 생각한다.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

출처 : 대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