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장춘
‘불우와 고난 속에 진리를 토파내어/ 종자합성 새 학설을 세계에 외칠 적에/ 잠잠턴 학문의 바다 물결 한 번 치니라/ 온갖 채소 종자 우리 힘으로 길러내어/ 겨레를 위하시니 그 공로 얼마던고/ 빛나는 문화포장을 웃고 받고 가니라/ 흙에서 살던 인생 흙으로 돌아가매/ 그 정신 뿌리되어 싹트고 가지 뻗어/ 이 나라 과학의 동산에 백화만발하리라’
경기도 수원시 농촌진흥청 구내 여기산 기슭에는 육종학의 선구자 우장춘이 잠들어 있다. 묘비에는 시인 이은상이 지은 시조를 새겨넣었다.
우장춘의 아버지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일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 조선군 훈련대 제2대대장 우범선이다. 이듬해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일본 도쿄로 피신한 뒤 현지 여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1898년 우장춘을 낳았다.
우범선은 1903년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고영근에게 암살됐다. 우장춘은 보육원에 맡겨졌다가 홀어머니 손에 자랐다.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데다 조선인의 자식이라는 설움까지 받아야 했으나 한국계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았다. 호적에는 일본식 이름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라고 올렸으면서도 평소엔 한국식 성을 고집했다. 육종학 서적에 단골로 등장하는 ‘UN’이란 표기는 ‘우 나가하루’의 영문 약자다.
히로시마 구제중학교를 고학으로 마치고 조선총독부 도움으로 도쿄제국대 부설 전문학교인 농학실과를 다녔다. 1919년 졸업 후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했다. 1930년 개발한 겹꽃 피튜니아(일명 우장춘 꽃)는 미국 시장에 불티나게 팔려나가 ‘피튜니아의 마술사’란 별명을 얻었다. 1936년 조선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박사학위를 받고 면화시험장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이듬해 다키이연구농장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45년 광복을 맞자 우장춘은 농장장 자리를 내던지고 귀국을 서둘렀다. 일본 정부의 만류를 뿌리친 뒤 한국인 귀국 예정자들이 대기 중인 오무라수용소에 들어갔다. 한국에서도 환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됐다. 결국 1950년 3월 8일 일본인 아내와 2남 4녀를 일본에 남겨둔 채 홀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환영 인파에게 “지금까지 어머니 나라를 위해 힘썼으나 이제는 아버지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농촌진흥청 원예연구소 전신인 한국농업과학연구소 책임을 맡겼다. 그는 농림부 장관 제의나 거액의 스카우트 유혹도 마다하고 이곳에 머물며 연구에 몰두했다.
한국 농민들은 일본 채소 종자에 의존해오다가 해방 후 일본이 종자 반출을 막자 농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장춘은 1954년 전남 진도에서 종자를 채취한 무와 배추의 원종(原種)을 생산하는 데 성공해 농가에 보급했다. 요즘 김치로 담그는 배추와 무는 그가 우리 입맛과 풍토에 맞게 개량한 것이다.
대관령 시험장에서 개발한 무병(無病) 씨감자는 오늘날 즐겨 먹는 ‘강원도 감자’의 모태가 됐고, 제주도민을 먹여 살린 밀감과 유채도 우장춘에 의해 본격 재배됐다. 고추, 양파, 오이, 토마토, 참외, 수박 등도 그의 손을 거쳐 우량종으로 개선돼 자립 농업을 넘어 종자 수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밖에 장미, 카네이션, 국화 등의 품종을 개량하고 코스모스를 전국의 철로변과 길가에 심게 했다.
부산대 초빙교수를 지내며 후진 양성에도 힘을 쏟았다. 그는 평소 제자들에게 관찰의 중요성을 역설하며 “안광(眼光·눈빛)이 지배(紙背·종이 뒷면)를 철(徹)한다”는 말을 본떠 “안광이 엽배(葉背)를 꿰뚫으라”고 가르쳤다.
우장춘은 1953년 6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일본을 방문하려 했으나 정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염려해 출국을 불허했다. 결국 임종하지 못한 채 연구소 강당에 분향소를 마련했다. 각계에서 답지한 조위금으로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주민을 위해 우물을 파고 ‘어머니의 젖줄 같은 샘’이란 뜻으로 ‘자유천(慈乳泉)’이라고 이름 지었다.
우장춘이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것은 이기작(二期作)이 가능한 벼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십이지장궤양이 악화해 서울 국립중앙의료원에 입원한 뒤에도 병상의 링거병 옆에 벼를 비닐봉지에 담아 걸어놓고 관찰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다.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다면 보릿고개란 말이 더 일찍 사라질 수도 있었다.
1959년 8월 7일 이근식 농림부 장관은 병상에 있던 우장춘에게 문화포장을 수여했다. 애국가 작곡자 안익태(1955년)에 이어 두 번째 영예였다. 그는 기념 메달을 목에 걸고 “마침내 조국이 나를 인정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로부터 사흘 뒤 눈을 감았고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부산시는 우장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1999년 동래구 우장춘로의 원예시험장 자리에 우장춘기념관을 건립하며 입구를 ‘씨 없는 수박’을 연상하도록 꾸몄다. 이는 1947년 일본의 기하라 히토시가 개발한 것이다. 우장춘이 귀국 후 육종학 원리를 소개하며 이를 대표적 사례로 들며 재배 시연까지 하다 보니 그가 발명한 것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렇다고 우장춘과 전혀 관련 없는 건 아니다. 그는 배추와 양배추 사이의 자연교잡으로 유채가 생겨난 것을 보고 인공 실험으로 재현했다. 이로써 생물이 ‘자연 선택’만으로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종간(種間) 결합’도 작용한다는 점이 입증돼 찰스 다윈의 진화론이 수정됐다. 우장춘의 연구를 토대로 기하라는 수박의 염색체 수를 변형한 뒤 정상적인 개체와 교배해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