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한미 양국은 7월 30일 미국이 한국에 부과하는 상호관세와 자동차 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대신 한국이 미국에 3500억 달러를 투자한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2개월 반이나 흐른 10월 중순 현재, 후속 협상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투자 방식과 수익 배분을 두고 이견이 크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의 경제 규모와 외환 보유고 등을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의 국내 경제적·정치적 배경(인플레이션, 공급망 재편, 중간 선거 등)으로 인한 미국의 '무리한 요구'가 발목을 잡았다. 한국은 미국에 투자하는 3500억 달러를 상한선(ceiling) 개념으로 이해하며, 현금 투입은 최소화하고 대출과 보증을 주된 방식으로 상정했다. 반면 미국은 전액 현금 투자를 주장하고 있다. 그것도 '선불(up front)'로 하라는 것이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9월 말 기준 약 4163억 달러다. 3500억 달러는 외환보유고의 84%나 되며, 이 금액을 송금하면 한국은 외화위기에 직면할 가능성이 커진다. 송금 후 잔액은 663억 달러로, 국제통화기금(IMF)이 권고하는 한국의 적정 보유액 하한선인 4700억 달러의 14% 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 과거 1997년 IMF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30년 가까이 탄탄하게 쌓아 올린 외환방어벽을 대미 투자로 하루아침에 허무는 셈이다.

한국은 이러한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미국 측에 '무제한 통화 스왑(Unlimited Currency SWAP)'을 '필요조건'으로 요구했다. 금액과 기간 제한 없이 원화를 맡기고 달러를 쓸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다. 달러 유동성 안전망을 구축하여 제2의 IMF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무제한 통화 스왑은 중앙은행 간의 협정으로, 유사시 자국의 화폐를 맡기고 약정된 금리를 내면 상대방 통화를 무제한으로 빌릴 수 있도록 하는 약정이다. 이는 사실상 '달러 마이너스 통장'과 유사하게 한도 없이 달러를 조달할 수 있다. 이는 대규모 달러 유출로 인한 외환시장 충격을 완화하고, 외환위기를 방지하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 특히 한국처럼 대외 의존도가 높은 국가에서는 외환시장 건전성 악화가 국가 신뢰도를 저해하고 외환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이때 무제한 통화 스왑은 외환시장을 보호하고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 대비할 수 있게 한다. 결국 외환위기나 금융시장이 불안할 때 '심리적 안정 효과'를 주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는 것이다.

실제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한국은 미국과 300억 달러의 긴급 통화 스왑을 체결했다. 또한 2020년 팬데믹 때도 600억 달러의 통화 스왑을 맺었다. 최초 기간은 6개월이었지만 3차례 연장을 거쳐 2021년 12월 31일 종료됐다. 그 결과 원·달러 환율이 큰 폭으로 떨어지며, 불안했던 외환시장이 빠르게 안정됐다. 지난주에는 경제적 위기를 겪고 있는 아르헨티나에 희토류와 우라늄 자원 개발에 미국 기업이 참여하는 것을 전제로 200억 달러의 미아? 통화 스왑을 체결했다.

미국이 요구한 3500억 달러는 한국이 1년에 외환시장에서 조달할 수 있는 금액인 200~300억 달러의 10배가 넘는다. 외환시장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대미 투자로 자본 유출 우려와 금융시장에 미치는 부정적인 효과는 물론 환율이 폭등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걱정거리다.

그래서 이번에 우리 정부는 일시적인 스왑이 아니라 무제한 스왑을 요구한 것이다. 이번 투자로 인한 외환 부족사태가 언제 끝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금년 2월 말 기준, 캐나다, 중국, 스위스, 인도네시아, 일본, 호주, UAE, 말레이시아, 튀르키예 등과 약 1500억 달러 규모로 통화 스왑을 맺고 있지만, 3500억 달러에는 턱없이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러나 미국과의 무제한 통화 스왑 협정이 성사되면, 대미 투자액에 빠져나가더라도 환율이나 투자심리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주식과 채권시장에서도 해외 자금을 묶어 둘 수도 있다. 결국 미국과의 통화 스왑은 한·미 통상 협상에서 중요한 과제일 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의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 장치인 셈이다.

하지만 미국은 EU, 영국, 스위스, 캐나다, 일본 등 기축통화국에 한정해서 무제한 통화 스왑 협정을 체결하고 있다. 이는 해당 통화의 국제적 위상, 금융시장의 안정성, 그리고 협력 관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다.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신뢰도가 높으며, 외환시장에서 쉽게 거래될 수 있는 충분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 통화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화는 국제 기축통화도 아니고, 글로벌 외환시장 거래 비중도 작아서 한국과는 무제한 통화 스왑 체결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통화 스왑은 동서 냉전의 산물이다. 미국과 소련의 긴장 상태가 극에 달한 상황에서,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하자 S&P 500 지수는 경험이 적은 젊은 대통령에 대한 우려로 23%나 폭락하며 금융시장은 크게 요동쳤다. 이에 불안을 느낀 미 연준은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벨기에, 스위스, 네덜란드,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 9개국과 국제결제은행에 달러를 맡기고 외화를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계약기간은 3~6개월에 불과했지만 금융시장은 빠르게 안정됐다. 아이러니하게도 통화 스왑은 이렇게 유럽 중앙은행들이 궁지에 몰린 미국을 돕기 위해 탄생했다.

지난주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한미 관세협상은 이견을 좁히고 있고 무제한 통화 스왑 체결 논의가 있었으며 현재 미국과 외환시장의 민감성 등과 관련해 상당한 공감대가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진전은 없는 상태다.

협상이 길어지면서 우리 정부는 협상 '속도'보다 '국익'을 우선시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지만, 미국은 고율 관세로 복원시키겠다며 조속한 합의를 요구함과 동시에 반도체·바이오 분야에 대한 추가 관세 부과, 투자금 선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다각도로 압박하고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이 한미 관세협상 파기를 선언하며, 상호관세와 자동차 품목별 관세를 25%로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거란 의견이 지배적이다. 여러 면에서 양국의 상호 의존도가 적지 않은 만큼, 양측 모두 타결을 원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법률과 정치 사정을 고려해 볼 때 무제한 통화 스왑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관된 의견이다. 통화 스왑의 체결 권한은 행정부가 아니라 연준이 갖고 있는데, 연준은 "특정 국가의 외환시장 불안을 이유로 단독으로 상시 스왑을 맺는 것은 미국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한국은 현금 일괄 투입 대신 대체 수단을 중심으로 협상 전선을 재정비하고 있다. 스왑의 규모, 금융 지원 방식 변경이나 시차를 둔 단계적 투자 방안 등을 포함하고 있다. 조선, 반도체, 배터리 등 핵심 산업 분야의 협력 중요성도 부각하고 있다. 이미 반도체, 배터리, 철강, 자동차 등에서 1000억 달러 이상의 투자 계획도 내놨다. 관세를 넘어 포괄적인 동맹 및 경제 협력의 틀에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좋은 담장이 좋은 이웃을 만든다(Good fences make good neighbors)'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미국이 어려울 때 중앙은행 간 통화 스왑을 발명한 윌리엄 마틴 연준 의장이 우방국에 손을 내밀 때 자주 인용했다고 한다. '좋은 담장'은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면서도 상호 공존이 가능한 '적절한 높이'가 핵심이다.

한국 경제의 불안정은 곧 글로벌 공급망의 혼란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미국의 인플레이션 대응과 경제 안정화 노력에 악영향을 줄 수 있음을 명심하여, 미국은 책임 있는 자세로 우방국과의 협상을 완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