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제품 자원순환 체계 개요가장 좋은 자연보호 방법은 오염 물질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는 현대 사회에서 불가능하다. 원시시대처럼 오직 나무와 흙으로 집을 짓고 돌을 깎아 도구를 만들 수 없다. 플라스틱과 같이 수만 년 썩지 않는 화학제품에 길들어졌고, 넘치는 소비생활에서 ‘자연을 위한 절제’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차선으로는 ‘아나바다(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는)’ 방법이다. 한 번 생산한 제품을 최대한 오래도록 사용하고, 다 쓴 제품을 다시 활용하는 것은 환경친화 측면에서 무척 유용하다.
흔히 재활용이라 부르는 이런 방식은 지금까지 소비자 몫으로 여겨 왔다. 물건을 쓴 사람이 그 물건이 다시 쓰임새를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했다. 그 결과 한국 소비자들은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재활용에 ‘진심’인 사람이 됐다.
다만 소비자 중심 재활용 제도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재활용에 진심이라 하더라도 제품 자체 특성으로 재활용이 안 되거나, 어려운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점을 고민한 정부는 한일 월드컵 이듬해인 2003년 1월 1일부터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도입했다.
EPR은 제품을 생산한 주체에게 해당 제품이 훗날 재활용될 수 있도록 책임을 부여하는 내용이다. 쉽게 말해 물건을 설계할 때부터 훗날 소비자들이 재활용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만들라는 의미다.
단순 권고가 아닌, 경제적 부담을 지워 제도 도입에 강제성을 부여했다. 제도를 이행하지 않으면 재활용에 드는 비용보다 많은 재활용 부과금을 생산자에게 부과하는 방식이다. 제도 도입 당시에는 포장재 정도에만 적용하다가 점차 확대하고 있다.
현재 EPR 적용 품목을 포면 포장재에서는 종이 팩(합성수지 또는 알루미늄박이 부착된 경우)과 유리병, 금속 캔, 합성수지 재질의 포장재, 부동액·브레이크·윤활유 등에 적용 중이다. 전기기기류 등의 포장재 필름이나 시트형 포장재, 발포 합성수지 완충재도 대상이다. 일회용 봉투·쇼핑백, 합성수지 재질의 일회용 봉투·쇼핑백도 마찬가지다.
제품별로는 필름류(5종)를 시작으로 ▲전지류 ▲타이어 ▲윤활유 ▲조명 ▲수산물 양식용 부자 ▲다시마(곤포) ▲사일리지용 필름 ▲합성수지재질 ▲김발장 ▲교체용 정수기 필터 ▲안전망 ▲어망 ▲밧줄 ▲폴리에틸렌관 ▲폴리염화비닐 ▲팔레트 ▲플라스틱 상자 ▲창문 ▲바닥재 ▲단열재 ▲전력선 ▲자동차 유리 관리용 부품 등 무수하다.
EPR 운영을 담당하는 한국환경공단은 “폐기물 재활용에 대한 법적 의무는 생산자에게 있지만, 생산자가 수거부터 재활용 전 과정을 직접 책임진다는 의미는 아니고, 소비자와 지자체, 생산자, 정부가 일정 부분 역할을 분담하는 체계”라며 “제품의 설계, 포장재의 선택 등에서 결정권이 가장 큰 생산자가 재활용 체계의 중심적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라고 제도 도입 배경을 설명했다.
한국환경공단은 “우리나라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제도가 아니라 이미 생산자 책임원칙에 의해 1992년부터 운영해 온 ‘예치금제도’를 보완 개선해 2003년 1월 1일부터 EPR을 시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과거에 생산자들은 제품을 만들 때 재활용이 쉬운 재질로 만들어 이를 판매하는 시점까지 책임을 지면 됐지만, EPR로 인해 폐기물의 재활용 단계까지 그 책임의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정부는 해마다 시기별로 생산자가 수행해야 할 의무를 정해두는 등 체계적인 프로세스를 구축해 ERP 운영 중이다. 생산자는 ‘재활용 의무 이행 계획서’, ‘결과보고서’, ‘사업실적서’ 등을 제출해야 한다.
내년 1월부터 모든 전기·전자제품으로 확대
내년 1월 1일부터는 모든 전기전자제품에 EPR을 확대 적용한다. 그동안은 세탁기와 냉장고 등 중·대형 가전제품 50종만 대상이었다. 앞으로는 무선이어폰과 휴대용 이어폰, 보조 배터리, 전동 킥보드 등 중·소형을 포함한 모든 전기·전자제품으로 확대한다. 컴퓨터 완제품이 아닌 본체나 그래픽카드처럼 부속·부분품을 소비자에게 판매하면 최종단계 제품은 EPR 대상이다. 의료기기와 군수품 등 일부만 제외한다.
환경부는 전기·전자제품 추가 재활용으로 연간 철과 알루미늄 등 유가 자원 7만6000t을 회수해 2000억원 이상의 환경·경제적 편익이 발생할 것으로 전망한다.
전자제품에 이어 플라스틱 완구류에도 EPR을 확대 적용한다. 플라스틱 완구류를 제조·수입하는 사업자는 환경부가 매년 산정·고시하는 재활용의무율만큼 해당 품목을 회수·재활용해야 한다.
다만 연간 매출액 10억원 미만, 출고량 10t 미만인 제조업자, 수입액 3억원 미만이거나 수입량 3t 미만인 수입업자는 해당하지 않는다.
EPR은 기본적으로 생산자에게 부담을 지우는 제도다. 다만 소비자와 정부(지자체 등)에도 역할을 부여한다.
구체적으로 소비자는 제품을 사용하고 재활용품의 분리배출 철저히 해야 한다. 생산자는 회수와 재활용 의무를 진다. 재활용사업공제조합은 재활용 의무 공동 이행을 위한 분담금을 관리한다.
지방자치단체는 분리수거 업무를 철저히 관리해 제도 위반자에 과태료를 부과한다. 한국환경공단은 생산자별 출고량, 회수·재활용 의무이행계획서 접수·승인하다. 필요에 따라 재활용 현장 확인 조사도 진행한다.
환경부는 법령 제·개정 등 전반적인 제도 운영을 맡고, 해마다 품목별 재활용의무율을 산정 고시한다.
폐의류도 EPR 적용 필요성 제기
EPR 적용 대상은 앞으로 계속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기후위기 상황에서 환경 오염을 줄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국내 폐의류에도 EPR을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한국환경연구원(KEI)은 지난 4일 ‘폐의류의 국내 재활용 체계 구축 방안 연구’를 통해 국내 폐의류(헌 옷) 재활용 체계의 조속한 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KEI에 따르면 현재 국내에서만 한 해 80만t의 의류 쓰레기가 발생한다. 이 중 약 30만t을 중고의류 형태로 해외에 수출한다.
문제는 상품 가치가 낮은 의류들이 수입국에서 적절히 처리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소각되거나 매립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처리로 환경오염과 건강 문제 때문에 국제사회에서는 중고의류 수출 기준을 강화하려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폐의류 수출이 어려워진다는 것은 국내에서 자체 처리하는 양이 증가한다는 의미다. 폐의류 처리량과 처리비용이 증가하면 민간 수거 체계가 원활히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 소각량 증가는 소각시설 부족과 온실가스 배출 문제를 심화시킨다. 이 때문에 폐의류 국내 재활용 체계 구축이 시급하다.
현재 국내 폐의류 수거 및 처리 체계는 민간 중심으로 운영 중이다. 지자체는 관리시스템이 미비한 현실이다. 수거량이나 처리 현황 데이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지자체가 대다수다. 폐의류 관리에 관한 조례나 지침을 제정한 지자체조차 업체 선정, 수거함 관리, 불법투기 방지 등 최소한의 조치만 이뤄진다.
KEI 연구진은 보고서를 통해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를 폐의류 문제 해결 핵심 수단으로 제시했다.
프랑스와 네덜란드, 헝가리, 라트비아, 북마케도니아 등 국가에서는 이미 의류 분야에 EPR을 도입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KEI는 “저렴한 옷을 빠르게 소비하고 폐기하는 ‘패스트 패션’ 유행으로 폐의류 문제가 또 하나의 환경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며 “섬유 산업은 생산과정에서 물과 자원, 유해 화학 물질을 다량 사용하고 온실가스 배출이 높은 업종으로, 섬유 소비는 식음료, 운송, 주택에 이어 4번째로 환경과 기후변화에 악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했다.
출처 데일리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