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군 EA-18G 그라울러. 미국이 6월 이란 핵시설을 타격한 ‘미드나이트 해머’ 작전에 투입된 ‘에스코트 재머(escort jammer)’ 형태의 전자전 항공기다. 미국 공군 제공
인도와 파키스탄이 120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대규모 공중전을 벌인 올해 5월. 당시 교전에서 인도는 라팔 스탠더드 F3R과 Su-30MKI를 주축으로 한 전투기 80여대로 선제 공격에 나섰다. 파키스탄 공군은 J-10CE 40여 대를 출격시켜 맞섰지만 수적으로나 기체 성능 면에서는 열세였다.
하지만 결과는 인도 전투기 3대를 격추시킨 파키스탄의 완승으로 끝났다. 승부를 가른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전투기나 무기의 성능도 중요한 변수였지만 결정적 변수는 파키스탄의 전자전이었다. 인도 전투기와 관제소의 통신을 감청함으로써 상대 움직임을 손바닥처럼 파악했기 때문이다.
미국·러시아·중국 등 강대국만 개발 성공
인도-파키스탄 공중전은 현대전의 성패가 전자전에 달렸음을 여실히 보여줬다. 전자전을 전담하는 무기체계인 ‘전자전 항공기(전자전기)’의 중요성이 날로 높아지는 이유다. 전자전기는 적 방공망과 통신체계를 재밍(jamming‧전파 교란)해 무력화시키는 전략 자산이다. 미국이 6월 이란 핵시설을 타격한 ‘미드나이트 해머’ 작전 성공 이면에도 미리 이란의 방공망과 통신체계를 제압한 EA-18G 그라울러, EC-130H 컴퍼스콜 등 전자전기의 활약이 있었다. 전자전기 제작에 필요한 기술 난이도가 높은 탓에 미국, 러시아, 중국 등 극소수 국가만 개발해 운용하고 있다. 현재 한국도 미국 전자전기에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이다. 미국이 전시작전권 전환의 조건 중 하나로 한국군의 전자전 역량 확보를 제시했을 정도로 전자전기 개발은 중요한 안보 과제가 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도 ‘한국형 전자전기’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방위사업청은 최근 원거리 전자전기 확보를 위한 체계 개발 기본계획을 의결했다. 2034년까지 1조7775억 원을 투입해 한국형 전자전기 Block-Ⅰ 체계를 개발하는 게 뼈대다. 적의 탐지거리에서 벗어난 먼 거리에서 전자전을 수행하는 스탠드오프 재머(stand off jammer)를 국내 개발로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한국형 전자전지 플랫폼으로 선정된 기종은 캐나다 봄바르디에의 비즈니스 제트기 Global 6500이다. 이번 전자전기 도입 사업은 Global 6500을 전자전 임무에 맞게 재설계하고 각종 장비를 통합해 시험평가까지 완수하는 ‘체계 종합’ 프로젝트다.
한국 최초의 전자전기 체계 개발 사업에는 한국항공우주산업(KAI)-한화시스템과 LIG넥스원-대한항공 컨소시엄이 각각 도전장을 냈다. KAI 컨소시엄은 한국형 초음속 전투기 KF-21 등 여러 항공기 개발에서 축적한 기술과 경험이 강점이다. KAI는 국내 기업 중 유일하게 미국 국방부의 군용 감항인증(堪航認證‧airworthiness certificate) 기준인 MIL-STD-516에 부합하는 군용기 인증 역량을 갖췄다. 감항인증은 항공기의 강도와 구조, 성능 등 ‘감항성’을 인증받는 것으로 항공기 개발 및 제작의 주요 허들로 꼽힌다. KAI와 손잡은 한화시스템은 KF-21에탑재되는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레이더를 개발하는 등 전자전 핵심 장비 개발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LIG넥스원 컨소시엄은 전자전 장비 개발 역량을 장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LIG넥스원은 항공기용 전자공격(ECM), 디지털 레이더경보수신기(RWR), 전자지원(ESM), 전자보호(EPM) 등 전자전 관련 기술을 갖추고 있다. 고출력 전자파를 쏴 적 유도무기 및 통신체계를 무력화하는 지향성 전자공격 기술을 실증한 기업이기도 하다. 대한항공의 경우 그간 군용기 성능개량 및 정비, 민항기 중정비·개조 등에서 오랜 경험을 갖췄다.
전자전 장비 단순 ‘장착’ 아닌 ‘통합’이 핵심
한국형 전자전기 Block-Ⅰ 체계 개발 사업의 항공기 플랫폼으로 선정된 캐나다 봄바르디에의 비즈니스 제트기 Global 6500. 봄바르디에 제공
두 컨소시엄이 전자전기 개발 적임자를 자처하는 가운데 흥미로운 점은 양측 모두 ‘백두정찰기’ 사업 경험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백두정찰기는 신호정보(SIGINT·시긴트), 통신정보(COMINT·코민트)를 바탕으로 북한의 통신·장비 운용을 실시간 감시하는 한국군의 핵심 자산이다. KAI는 신형 백두정찰기를 개발하는 ‘백두체계 능력 보강 2차 사업’의 체계 종합 개발 주관사임을 강조하고 있다. 대한항공의 경우 ‘백두체계 1차 사업’을 수행한 이력을 앞세우고 있다.
그런데 두 기업의 백두정찰기 사업 경험에는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는 게 방산업계의 시각이다. 백두 1차 산업은 국방과학연구소가 체계 개발을 주관한 것으로, 대한항공은 항공기 개조에만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백두 2차 사업은 민간 방산기업이 주도하는 형태다. KAI는 해당 사업에서 체계 종합 개발을 주관하고 있다. 전략자산 사업을 수주한 이력이 있다고 해도 단순 참여와 체계 종합 간에는 질적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번 사업은 전자전 장비가 아닌 ‘전자전 항공기 체계’ 프로젝트다. 전자전 항공기 개발에서 핵심은 각종 전자전 장비를 효과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전자전 장비 자체의 성능이 아무리 우수해도 이를 제대로 통합하지 못하면 전자전기로서의 제대로 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전자전기가 쏘는 재밍 전파는 적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도 위협적이다. 고출력 재밍과 각종 전자파 간섭으로부터 전자전기가 받는 영향을 최소화하려면 그에 맞는 설계와 인터페이스 통합이 전제돼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전자전기 체계 통합은 뛰어난 과학 기술과 방산 역량을 갖춘 프랑스와 일본도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향후 한국형 전자전기 사업도 크고 작은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체계 종합 경험이 무엇보다 중요한 자산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번 사업에서는 전자전 장비를 기체 플랫폼에 단순 ‘장착’하는 게 아닌 ‘통합’된 전자전기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핵심 과제로 부상하고 있다.
한국형 전자전기 사업의 또 다른 핵심 포인트는 ‘국산화’다. 전자전기를 보유한 나라는 우방이나 동맹에도 관련 기술을 공유하지 않는다. 전자전기 개발에서 각종 기술을 내재화하는 ‘기술 자강’이 절실한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과거 백두 1차 사업 당시 해외 감항인증을 맡은 미국 업체와 관련된 난맥상은 중요한 참고가 된다. 해당 미국 업체가 백두 2차 사업에는 자사 자료 및 기술을 쓸 수 없다고 강변해 사업에 차질이 빚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백두 2차 사업은 사실상 새로운 사업처럼 진행되고 있다는 후문이다.
일각에선 향후 한국형 전자전기의 단계적 발전을 고려하면 자체 항공기 플랫폼이 필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한국형 전자전기 도입은 어디까지나 ‘Block-Ⅰ’ 사업이다. 이 사업이 완료되더라도 한국의 전자전 역량이 완성됐다고 보긴 어렵다. 이번 사업으로 도입된는 스탠드 오프 재머 뿐 아니라 전투기, 폭격기 등 항공기와 편대를 구성해 함께 움직이는 ‘에스코트 재머(escort jammer)’. 적 위협 한가운데서 임무를 수행하는 ‘스탠드 인 재머(stand in jammer)’까지 두루 갖춰야 전자전 역량이 오롯이 갖춰지는 것이다.
첫 단추인 스탠드 오프 재머 단계에서 해외업체의 입김이 강해질 경우 국산화가 절실한 전자전기 도입 사업 전반에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도 적지 않다. 자체 항공기 개발 경험이 많은 KAI는 앞으로 자체 개발한 4.5세대 초음속 전투기인 KF-21을 에스코트 재머인 KF-21EX로 발전시킬 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출처 주간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