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인 술 소비 감소가 다양한 업종의 판도를 바꾸고 있다. 글로벌 소비재 공급망에서 상업용 부동산 시장까지 흔들면서다. 국내에서도 술 소비 감소로 관련 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미국인 금주 역대 최대
29일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글로벌 여론조사업체 갤럽은 하루 1~2잔의 음주도 건강에 해롭다고 여기는 미국의 비중이 과반수(53%)에 달한다는 내용의 조사 결과를 지난 13일 발표했다. '현재 술을 마신다'고 답한 비율은 역대 최저치인 54%로 급락했다. 특히 만 18~34세 젊은 층의 금주가 눈에 띈다. 2023년 59%였던 '술을 마신다' 응답이 올해 50%까지 떨어졌다. 영국 경제 전문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세계 주류업계가 Z세대의 금욕주의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미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데이터에 따르면 다수의 회원국에서 1인당 알코올 소비량은 2011년 이후 감소 추세를 보였다. 청소년 음주율의 하락은 세계적인 공통 현상이다. 시장조사업체 엔씨설루션스(NCSolutions)의 올해 설문에서도 Z세대 65%는 적극적으로 음주를 줄이려 노력 중이라고 답했다. 이는 밀레니얼(57%), X세대(49%), 베이비붐 세대(39%)보다 높은 비중이다.
업계에선 이런 현상을 두고 ‘소버 큐리어스(Sober Curious)’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중심으로 빠르게 퍼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소버 큐리어스란 ‘술 취하지 않은’이라는 의미의 ‘소버(Sober)’와 ‘궁금한’이라는 뜻의 ‘큐리어스(Curious)’가 결합한 신조어다.
실제 주류 소비량은 줄고 있다. 국제주류시장연구소(IWSR)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주류 소비량은 전년보다 1% 감소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2% 줄었다. 특히 2023년 와인 소비량은 2.6% 급감하며 1996년 만의 최저치를 기록했다.
글로벌 주류업체는 직격탄을 맞았다. 세계 1위 맥주회사인 AB인베브는 올 2분기 판매량이 1.9% 감소하며 시장 예상을 하회했다. 특히 브라질 판매량이 9% 급감했다. 중국도 7.4% 줄었다. 그 결과 지난달 31일 실적 발표 후 주가는 하루 만에 11% 급락해 5개월 만의 저점까지 떨어졌다.
세계 최대 증류주 업체인 영국의 디아지오도 상황도 좋지 않다. 지난 5일 발표한 'FY2025' 결과에 따르면 순 매출은 전년 대비 0.1%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27.8% 급격히 줄었다. 높은 인플레이션에 따른 비용 부담과 미국·유럽 수요 둔화가 겹쳐 이익률이 하락한 것이다. 디아지오의 주가는 최근 1년 새 30% 이상 급락했다.
글로벌 2위 증류주 업체인 프랑스 페르노리카드도 최근 'FY2025' 실적 발표에서 매출이 3% 감소했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중국 시장 부진이 주요 요인이다. 페르노리카드의 대표 브랜드인 앱솔루트 보드카는 미국에서 판매가 줄었고, 중국에서도 경제 불안으로 코냑 마르텔 등이 타격을 입었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아시아 지역의 대표 주류사인 일본 아사히도 자국 시장 정체와 해외 시장 비용 상승 여파로 수익성 감소를 겪고 있다. 올 2025년 상반기 아사히의 매출은 전년 대비 0.6% 증가로 정체했다. 반면 영업 이익은 엔화 기준 5% 안팎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유럽 사업에서 폴란드·헝가리 등 수요 약세와 이상기후 영향으로 2분기 판매량이 5% 줄어드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에서도 맥주 소비 감소 추세다.
술병업체와 술 가게도 직격탄
술 소비 감소로 글로벌 유리병 업체도 악영향을 받았다. 세계 최대 유리병 제조사 중 하나인 아르다그는 올해와 지난해 독일 드레브카우공장과 미국 일리노이 돌턴 공장을 폐쇄하기로 했다. 올 1분기에만 해당 손실 비용을 6500만 달러를 반영했다. 맥주·와인병 수요 감소해 관련 설비를 놀릴 수 없어 해당 라인을 중단한 것이다. 실제 독일의 경우 2023년 컨테이너 유리(병유리) 판매량이 전년 대비 15.5% 급감했다. 요한 오버라트 독일 유리산업협회 회장은 “수요 부진과 재고 축소 영향으로 마이너스 추세가 이어졌다”고 토로했다.
유럽뿐 아니다. 세계 1위 유리병 기업 O-I 글라스(옛 오웬스일리노이)도 작년 1분기 글로벌 출하량 12.5% 감소해 영업이익이 반 토막 났다. O-I 글라스는 작년과 올해 미국 일리노이주 공장과 오하이오주 설비를 잇달아 폐쇄했다. 관련 구조조정 비용만 2100만 달러를 반영했다. 지난해 전체 매출은 65억 달러를 기록해 전년보다 8% 감소했다. 올해 2분기에는 작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는 수준에 그쳤다.
유럽에선 술을 파는 가게도 직격탄을 맞았다. 영국은 전통적인 펍(pub) 문화의 본고장이라고 불렸지만 최근엔 '펍의 종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작년 상반기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에서 305개 펍이 영구 폐업했다. 매월 50곳씩 사라진 것으로 집계됐다. 2023년 상반기엔 383곳(월 64곳)보다는 감소 폭이 줄었지만 여전히 높은 폐업률이다. 영국의 펍 수는 사상 처음 3만9000개 아래로 떨어졌다.
영국맥주펍협회(BBPA)는 “펍 한 곳 한 곳은 그 사회·공동체에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기여를 해왔다. 단 한 곳의 폐업도 비극”이라고 토로했다. 폐업한 펍 상당수는 주택, 사무실. 보육시설 등으로 용도 변경되거나 아예 철거된 것으로 알려졌다.
고용 영향과 주세 감소
음주 문화의 변화는 거시 경제에도 영향을 줬다. 전통적인 주류 중심 산업에서는 상당한 규모의 고용 감소가 발생했다. 영국의 펍 산업이 대표적이다. 영국맥주및펍협회(BBPA)는 올 한 해에만 펍 폐업으로 인해 5600개 이상의 직접적인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런 일자리 감소는 맥주 양조업자, 물류업체 등 관련 공급망 전반에 걸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럽의 유리병 제조업도 마찬가지다.
정부의 조세 수입 구조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전통적으로 주류세, 담배세와 같은 일명 '죄악세'는 많은 국가에서 안정적인 세원이었다. 그러나 OECD의 '소비세 동향 2024' 보고서에 따르면 2000년부터 2022년 사이 거의 모든 OECD 회원국에서 주류, 담배, 유류 등 '특정 상품에 대한 소비세'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였다.
반면 대체 음료 시장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논알콜 제품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았다. 이전에는 무알코올 맥주는 맛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기술 발전으로 품질이 향상하면서 고급 무알코올 주류 시장이 크게 성장했다. 미국 무알코올 맥주 시장은 2019~2022년에 70% 이상 성장했고, 유럽도 2023년에 무알코올·저도주류 시장 규모가 50억 유로를 돌파했다.
기존 주류 기업도 이 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하이네켄 0.0, 기네스 0.0, 버드와이저 제로 등 글로벌 맥주사들은 간판 브랜드의 논알콜 버전을 속속 내놓았다. '논알콜도 맛과 풍미에서 타협하지 않는다'는 슬로건으로 마케팅하며, 맥주 본고장 독일에서는 일부 양조장이 아예 전 제품을 논알콜로 전환하기도 했다. 앞서 세계 최대 증류주 업체 디아지오는 2019년 세계 최초의 논알코올 증류주 ‘시드립’을 인수하며 이 시장에 뛰어들었다. IWSR은 세계 논알코올 음료 시장이 2028년까지 연 7% 성장해 40억 달러 이상 규모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국도 절주 중
한국 역시 '소버 큐리어스' 흐름이 보인다. 국내 주세 통계를 보면 소주 판매량은 2010년대 후반부터 감소세로 전환했고 맥주도 1인당 소비가 정체했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지난 1주일 내 음주 경험이 있다”는 대한민국 성인 비율은 2016년 62%에서 2022년 57%로 떨어졌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주류 소비는 2015년 정점을 찍은 후 감소했는데,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빠른 하락 폭을 보였다.
국내 유흥업 및 주점 산업도 쪼그라들었다. 최근 통계청 자료 따르면 2022년 기준 주점 업종 사업체 수는 코로나19 확산 이전 대비 15% 이상 감소했다. 노래방 수도 급감해 2020년 2만8758곳에서 2024년 7월 2만5990곳으로 줄었다고 한국노래연습장협회가 밝혔다.
출처 한국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