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지정환 신부)


전북 임실은 이렇다 할 명승고적이나 특산물도 없고 내세울 만한 역사적 인물도 드물다. 그러나 이제는 임실 하면 누구나 치즈를 떠올린다. 한국의 전통 식품도 아닌 치즈를 임실의 간판 상품으로 만들고, 치즈 농장과 공장을 대표적인 관광 명소로 만든 인물이 벨기에 출신 지정환 신부다.

그의 본명은 디디에 엇세르스테번스다. 대대로 보험업과 금융업에 종사해온 귀족 집안에서 1931년 3남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뢰번가톨릭대와 성알베르토신학교를 졸업하고 1958년 사제품을 받았다. 부모는 아들이 선교사가 되겠다는 건 찬성했지만 한국으로 가겠다는 건 반대했다. 당시 한국은 아프리카보다 가난하고 언제 전쟁이 또 터질지 모르는 위험한 나라였다. 그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여건이 나쁜 만큼 보람이 더 클 것으로 여겨 한국을 고집했다고 한다.

영국 런던대에서 한국어과 1년 과정을 마친 뒤 1959년 12월 8일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부임했다. 전주교구 부주교인 김이환 신부가 지정환(池正煥)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지어주었다. 본명 ‘디디에’의 첫 글자와 비슷한 발음의 성을 택하고 김이환의 마지막 글자를 딴 것이다. 지 신부는 “정의가 환하게 빛날 때까지”라는 뜻이라고 풀이하기도 했다.

전주 전동성당 보좌신부를 거쳐 1961년 7월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발령받았다. 농사지을 땅조차 없어 굶주림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다 못해 간척 사업에 나섰다. 벨기에가 원조해준 밀가루를 팔아 공사비에 보태가며 3년에 걸쳐 100정보(30만 평)를 개간했다. 그러나 땅을 나눠 받은 농민 100명은 염분이 빠지기를 기다리지 못한 채 땅을 저당 잡혀 술과 노름에 빠졌다가 고리대금업자들에게 헐값으로 넘기고 말았다.

지 신부는 이때 병을 얻어 벨기에에서 담낭 제거 수술을 받고 돌아온 뒤 1964년 6월 임실성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안군에서 뼈저린 경험을 하고 “다시는 한국인의 삶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척박한 산골의 자연환경에서 가난을 숙명처럼 여기는 임실군 주민들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자활을 위해 청년들과 함께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때 지 신부는 다른 교구 신부에게서 선물 받은 산양 두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풀밭이 많은 임실 들판에 소보다 훨씬 값이 싼 산양을 방목한 뒤 젖을 짜서 팔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산양유는 한국인에게 익숙지 않아 팔리지 않았다. 고민 끝에 남아도는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기로 했다. 치즈는 분유나 버터 등 다른 유제품처럼 대형 시설이 필요하지 않아 집에서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부모한테 2천 달러를 후원받아 1967년 공장까지 지었으나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품질이 고르지 않으니 상품화하기도 어려웠다. 3년간 실패를 거듭하다가 프랑스와 이탈리아 치즈 공장을 견학하고 기술자에게 제조법을 배워 와서 1969년 본격적인 치즈 생산에 나섰다. 외국인 전용상점을 시작으로 판로를 넓혀가다가 조선호텔 납품을 계기로 이름을 얻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자 지정환 신부는 다른 신부들과 함께 석방 운동을 벌였다. 시위 도중 체포돼 추방 직전까지 갔다가 박정희 대통령이 “치즈 생산으로 농촌 발전에 헌신한 신부”라는 말을 듣고 추방 명령을 취소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때는 트럭을 몰고 광주를 찾아 시민들에게 우유와 식료품을 제공하기도 했다.

지 신부는 70년대 중반부터 그를 괴롭혀온 다발성 신경경화증을 치료하려고 1981년 11월 벨기에로 돌아갔다가 2년 만에 귀국했다. 이듬해 전주교구 장애인 사목 지도신부로 부임해 전주시 인후동에 중증 장애인을 위한 재활 공동체 무지개가족을 만들었다. 치즈 산업 개척과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2002년 호암상을 받았고, 상금과 치즈 상표권 수익 등으로 기금을 마련해 2007년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했다.

2016년 특별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얻었다. 창성창본도 허락받아 임실 지씨(任實 池氏)의 시조가 됐으나 후손은 없다. 2019년 4월 13일 선종해 전주시 완산구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됐다. 정부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해 봉사와 박애 정신을 기렸다.

지 신부는 치즈 공장 소유권과 운영권을 일찌감치 임실치즈축산업협동조합으로 넘겼다. 1986년 준공된 임실읍 갈마리 제1공장에서는 피자치즈·스트링치즈·모짜렐라치즈를 생산하고, 2019년 가동을 시작한 인근 제2공장에서는 포션치즈·훈연치즈·요구르트를 만든다. 지 신부가 처음 치즈를 만들었던 성수면 성가리의 농장과 공장 터는 테마파크로 꾸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