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O/IEC 42001(인공지능경영시스템) 구조
문명은 언제나 기준 위에 세워진다. 마차가 통과할 수 있는 도로 폭, 쌀을 측정하는 자, 시간의 길이를 재는 시계 하나하나가 문명의 질서를 만들어왔다. 오늘, 우리는 다시 새로운 문명을 설계하는 기로에 서 있다. 인공지능과 생명기술, 그리고 기후 위기의 경계에서 우리는 묻는다. “이 기술은 지속가능한가?” 그 질문의 대답은 기술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그 기술을 어떤 기준과 틀 속에서 실현하느냐, 다시 말해 ‘표준화’에 달려 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우리가 주목할 대상은, 다소 생소하면서도 중요한 한 영역이다. 바로 AI 융합 식품 패키징의 표준화이다. 음식물 쓰레기를 줄이기 위한 노력 속에서 등장한 지능형 포장 기술은 이제 단지 편의를 넘어 인류의 지속가능한 식문화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기술표준화’는 어떻게 숨 쉬고 있는가? 우리는 그 여정을 찬찬히 짚어볼 필요가 있다.
기술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패키징은 한때 조용한 존재였다. 말없이 식품을 담고, 소비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디자인만을 고민했다. 하지만 오늘날, 패키징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 음식은 아직 신선해요.” “이 정도 습도라면 하루는 더 괜찮을 거예요.” AI와 센서가 결합된 스마트 패키징 기술 덕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 걸기’가 설득력을 갖기 위해선, 그 말의 의미를 모두가 같은 언어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신선도 감지 센서의 수치는 어디까지를 안전하다고 볼 것인가? AI가 판단한 유통기한 예측은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포장재에 인쇄된 재활용 마크는 세계 어디서나 같은 방식으로 읽히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통일된 대답이 바로 ‘기술표준’이다.
네 개의 기둥 위에서 자라는 표준의 나무
AI 융합 패키징이 뿌리내려야 할 표준의 영역은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센서와 하드웨어의 표준화이다. 온도, 습도, 가스 농도를 감지하는 수많은 센서들은 이제 식품 포장의 내부로 들어왔다. 이들이 수집하는 데이터는 모두 다르지만, 그 정보를 해석하고 송수신하기 위한 공통의 규격이 없다면 시스템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둘째는 AI 알고리즘의 표준화이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도 다른 결과를 내는 AI라면, 신뢰할 수 없다. 학습된 데이터셋의 품질, 알고리즘의 설명 가능성, 그리고 판단의 투명성은 모두 표준화의 대상이다. 특히 식품과 관련된 판단은 소비자의 건강과 직결되기에, AI의 윤리성과 책임성까지도 표준 속에 포함되어야 한다.
셋째는 소재와 환경정보에 관한 표준화이다. PLA나 PHA 같은 생분해성 소재는 각기 다른 분해조건과 환경영향을 가진다. 이들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라벨링 체계 없이, 우리는 ‘친환경’이라는 말을 오히려 소비자에게 혼란으로 되돌려줄 수 있다. 포장재의 종류와 재활용 정보가 통일된 언어로 제공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순환경제가 시작된다.
넷째는 소비자와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표준화이다. QR코드를 스캔하면 어떤 정보가 어떻게 표시되어야 하는가? 패키징 경고 알림은 어떤 디자인과 색상으로 전달되어야 가장 효과적인가? 소비자가 AI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창이 바로 이 인터페이스이기에, 기술의 완성은 결국 소비자 경험의 통일성에서 빛을 발한다.
기준을 만드는 사람들
이 표준화의 흐름은 세계 각지에서 서로 다른 이름으로, 그러나 같은 방향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국제표준화기구 ISO는 TC122라는 분과를 통해 패키징 전반에 대한 기준을, ISO/IEC JTC1 SC42는 인공지능의 윤리와 구조에 대한 국제표준을 정립 중이다. RFID나 NFC와 같은 통신 기술은 IEC가, 제품 유통 데이터와 디지털 코드의 구조는 GS1이나 W3C 같은 기관이 관여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뒤처지지 않는다. 국가기술표준원은 AI 융합 제품의 KS 인증체계 개편을 시도 중이며,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스마트 패키징의 식품 안전성과 소재 안정성을 검토하고 있다. 환경산업기술원은 생분해성 포장재의 인증 기준을 수립 중이며, 산업통상자원부는 관련 기술을 보유한 스타트업의 국제 진출을 위한 표준 연계를 모색하고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AI와 패키징을 동시에 다룰 수 있는 융합형 표준 인프라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단일 기술 영역의 표준만으로는 복합적 기술 생태계를 설명할 수 없기에, 우리는 기술과 기술 사이의 ‘대화의 기준’까지 마련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 앞에 서 있다.
아직도 쓰레기통을 향해 가는 음식들
지금 이 순간에도, 신선한 채소가 무더운 창고 속에서 숨을 거두고 있다. 포장에 표시된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여전히 먹을 수 있는 우유가 폐기된다. 소비자는 그 사실을 모른 채, ‘규정’을 따랐을 뿐이다.
이처럼 기준의 부재는 기술의 부재만큼이나 위태롭다. 우리가 AI 융합 패키징의 표준을 정비하는 일은, 단지 기술의 언어를 통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와의 약속을 다시 쓰는 일이다. “필요한 만큼 먹고, 필요한 만큼만 버리겠다.” 이 작은 선언이 삶의 태도로 자리잡기 위해선, 기술이 먼저 기준을 갖춰야 한다.
기술이 아닌 기준을 디자인하는 시간
표준화는 단순히 문서나 매뉴얼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철학이다. “무엇이 옳은 판단인가”, “무엇이 안전한가”, “무엇이 지속가능한가”를 사회가 함께 결정하는 과정이다. 기술이 아무리 진보해도, 그 기술을 어떤 가치 위에 놓을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AI 융합 패키징의 기술표준화는 이제 막 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방향은 분명하다. 식품이 더는 헛되이 버려지지 않고, 기술이 인간의 삶을 더욱 정밀하고 친절하게 보호하며,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행위가 지구와의 공존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돕는 일.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첫 걸음이 바로 표준화다.
기준이 곧 미래다. 우리는 지금, 그 미래를 조용히 설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