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상해진 줄 알았던 K팝이 다시 세계를 흔들고 있다. K무속과 결합하고 애니메이션으로 탄생하더니 전 세계 차트를 휩쓸었다.

지난 6월 20일 개봉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개봉 직후 전 세계 40개국에서 넷플릭스 1위에 올랐다.

반짝 화제가 되고 말 줄 알았더니 인기 유지력은 더 놀랍다. 1위에 오르는 것보다 1위를 유지하는 게 더 힘든 넷플릭스에서 개봉 4주 차까지도 글로벌 순위 1위에 이름을 올렸다.영화에 삽입된 노래는 파급력이 더 세다.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속한 아이돌 그룹이 부른 노래가 미국 스포티파이 차트에서 1위를 찍었다. K팝 ‘그룹’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방탄소년단(BTS)의 ‘다이너마이트’도 3위에 그쳤던 미국 스포티파이 스트리밍 차트에서 갓을 쓰고 노래를 부르던 애니메이션 캐릭터가 1위를 한 것이다.

빌보드 차트에서도 순위가 꾸준히 오르고 있다. 여자 주인공이 속한 걸그룹이 부른 노래 ‘골든(Golden)’은 빌보드 ‘글로벌’(미국 제외)과 ‘글로벌 200’ 차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가상의 아티스트가 최초로 세운 기록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 음원을 담은 앨범은 빌보드 200차트에서 2위를 기록했다. 2020년대에 ‘빌보드 200’에서 ‘톱2’를 기록한 영화 OST 앨범은 ‘위키드(Wicked)’, ‘바비(Barbie)’, ‘엔칸토(Encanto)’가 전부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이 만든 허구의 그룹 노래가 현실 음악 시장을 거침없이 점령한 것이다.

올해 상반기 K팝 음반 수출액과 판매량이 모두 감소하면서 시장에 위기감이 고조된 것과는 정 반대의 흥행이다.

소재는 신선했고, 서사는 보편적

‘최대 진입장벽’이라 불리는 유치한 제목 탓에 성인 시청자들이 선뜻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재생 버튼을 누르기는 어렵다. 하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면 화려한 그림체와 스타일, 매력적인 캐릭터, 영화의 사운드트랙 등 인기를 끄는 요소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가장 큰 인기 요인은 소재의 신선함과 서사의 보편성이다. 가상의 3인조 K팝 걸그룹 ‘헌트릭스’가 무대 밖에서 악귀를 사냥하는 영웅으로 활약하는 이야기다. 걸그룹이 일종의 ‘무당’ 역할을 하는 것이다. K팝과 K무속을 결합한 소재는 그동안 한국에서도 볼 수 없던 이야기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더 신선할 수밖에 없다. 글로벌 영화평론사이트 로튼토마토에서 ‘케이팝 데몬 헌터스’는 신선도 지수 96%를 기록했다. 얼마 전 개봉한 ‘오징어 게임 3’(85%)나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서브스턴스’(89%)보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글로벌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K팝으로 다가가 무속의 콘텐츠 원형을 신선하게 던진 것이 먹혀들어간 것이다. 정덕현 문화평론가는 “한국 무속의 무당과 서양 오컬트의 퇴마사는 존재 이유가 다르다”며 “서양의 구마사제는 악령을 퇴치하는 역할이고 사후세계에 대한 인식이 선악 구도로 정확하게 나눠져 있다면 한국에서 귀신은 각자의 ‘서사’를 가지고 있어 무당이 그들을 설득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귀신이 단순한 ‘악’이 아니라 풀리지 못한 이야기와 매듭짓지 못한 감정을 품고 있어 콘텐츠에 정서적 밀도를 더한다는 설명이다.

K팝 걸그룹이 퇴마를 한다는 유니크한 소재와 달리 서사의 구조는 보편적이다. 결핍을 가진 주인공들이 위기를 극복하고 세상을 구하는 영웅 서사다. 그 속에 좌절과 용기, 우정과 희생, 무엇보다 자기 확신을 찾아가는 개인의 성장이 담겼다.


매기 강 감독은 “처음부터 K팝 영화를 만들려던 건 아니었다”며 “한국 문화로 애니메이션을 해보고 싶었고 스토리를 구상하다 보니 악귀 디자인이 멋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승사자·도깨비·물귀신 같은 이미지는 해외 프로젝트에선 볼 수 없는 독창성이라 생각했고 요즘 흔한 슈퍼히어로물에 어떻게 변화를 줄지도 고민했다”고 말했다.디테일에는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한 충실한 고증이 담겼다. 한국계 캐나다인 강 감독과 한국계 작가를 부인으로 둔 크리스 아펠한스 감독이 공동 연출을 맡고 한국인 작곡가, 아트 디렉터들이 참여해 디테일을 살렸다.

주인공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도 별자리가 새겨진 사인검, 무당의 무구인 신칼 등 전통 요소를 섬세하게 차용했다. 이는 다른 미국산 애니메이션 작품에선 다룬 적 없는 것이다. 게다가 아트 스타일과 몬스터 디자인은 한국의 전통 회화를 떠올리게 한다. 남자 아이돌 그룹은 저승사자로 등장하고 몬스터는 도깨비,물귀신 등 한국 전통 악귀의 모습을 하고 나온다.

주인공들은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국밥을 먹고 한의원에 간다. 남산 서울타워와 낙산공원 성곽길을 배경으로 악귀를 퇴치하고 주차금지 구역에는 버젓이 차가 세워져 있다. 휴지를 깔고 수저를 놓는 일종의 식당 예절도 담겼다.강 감독은 “모든 장면, 그리고 모든 디자인에 한국적인 요소를 가미해 최대한 한국다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했다.

K팝 문화 자체에 대한 이해도 높다. 후배 아이돌 그룹은 한국어로 ‘후배’라고 부른다. 아이돌을 우상으로 여기며 팬심이 곧 돈이 되는 엔터산업 구조 자체가 스토리의 중요한 토대가 된다.

‘악귀’ 역할을 하는 ‘사자보이즈’는 매력적인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헌트릭스 팬들의 ‘혼’을 빼오는 역할을 한다. 이들에게 홀리는 팬들은 스트리밍을 돌리고 앨범, 굿즈, 광고 상품에 돈을 쓰는 현실의 팬덤과 똑 닮았다. 듀스, 엑소, 트와이스 등 실제 K팝 아이돌의 노래도 흘러나온다.

' K팝 일타강사' 대거 참여

콘텐츠 업계에서는 한국적인 요소 외에도 애니메이션 자체의 완성도가 가장 큰 성공 요인이었다고 평가한다.

김지연 CJ ENM 콘텐츠전략 담당은 “K컬처라는 소재가 콘텐츠의 유니크함과 재미를 더한 것은 사실이나 애니메이션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스토리텔링와 기술적 완성도가 떨어졌다면 매력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며 “기존 익숙한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을 진일보시키는 요인으로 K팝과 K컬처가 한몫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영화를 성공으로 이끈 일등 공신인 ‘음악’은 더 철저하게 준비했다. 현역 작곡가와 안무진이 대거 참여해 기존 K팝 팬이 듣기에 이질감 없는 K팝을 창작했다.

빅뱅, 지드래곤, 블랙핑크, 2NE1 등 K팝 스타들과 작업해 온 전설적인 프로듀서 테디 박이 소유한 더블랙레이블이 작곡을 맡았다.

제작진이 작곡가들을 위해 장면과 등장인물들의 감정, 그리고 그 이유를 자세히 담은 문서를 만들어 전달하면 작곡가들이 이를 녹인 가사와 K팝 전개 코드가 담긴 음악을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주인공 루미의 노래를 맡은 EJAE(김은재)는 SM 연습생 출신 작곡가다. 레드벨벳의 ‘사이코’, 에스파의 ‘아마겟돈’ 등 히트곡 제조기로 통하던 그는 작곡진에 합류한 뒤 노래까지 직접 불렀다.

줄거리에 따라 전통적인 뮤지컬 구조를 피하고, ‘K팝 걸그룹’이 실제 음원을 만들고 공연을 한다는 설정으로 몰입감을 높였다.

강 감독은 “전통적인 뮤지컬처럼 캐릭터들이 감정을 노래하는 방식은 하고 싶지 않았다”며 “진짜 ‘K팝다운’ 음악을 위해 원타임 시절부터 팬이었던 테디의 더블랙 레이블과 협업했고 이안 아이젠드래스 프로듀서도 합류해 완성도를 높였다”고 말했다.

철저하게 준비한 K팝은 ‘노래가 좋으면 뜬다’는 뮤지컬 애니메이션의 성공 공식을 따랐다.

현역 K팝 아이돌들이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장면을 재연하거나 노래를 불러 올리면서 콘텐츠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콘텐츠 자체의 생명력과 IP 경쟁력이 높아지면서 스트리밍 플랫폼에서도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한경business